[詩의 향기]이상희/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 입력 1999년 6월 22일 19시 25분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시.는.돌.아.오.지.않.는.다

다시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묻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 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야수와 포옹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시집‘잘가라 내 청춘’(민음사)에서

언젠가 이 시를 읽고 무턱대고 거리를 걸어다녔던 생각이 난다. 무슨 일로였나? 그 때 마음이 많이 상했을 때인데. 문득 문득 생각했었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간혹 행복할 적이면 외려 더 짙게 드리워지는 생의 불안. 말해줘 데이지… 세상을 빠져나가면 어디에 당도하는지를.

신경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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