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39>낮은 곳으로 임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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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처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바보였다. 졸업유예 1년을 신청했다는 점 말곤 별다른 공통점도, 친분도 없던 대학 동기 준수가 며칠 자신의 고향집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했을 때, 그래, 그걸 함께 취업 못한 자들의 동지애적 손길쯤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혼자 학교식당에서 2500원짜리 정식 먹는 것보다야, 그래도 거기 가면 최소한 밥은 주겠지, 생각하면서 따라나섰다. 강원 평창이라…. 나는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 뜬금없이 강된장과 치커리 쌈 따위를 떠올렸다. 준수는 강원도를 향하는 내내 말없이,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게 단순히 우리 미취업자들의 일상 표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 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나도 눈높이를 좀 낮추고 취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게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가르침이었다.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 설령 눈높이를 낮춰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월급에서 학자금 융자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라…. 강원도에 갔다 온다 한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거기 가면 눈높이 따윈 없겠지,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버스는 두 시간 만에 장평 나들목 근처로 접어들고 있었다.

준수네 집은 평창군 미탄면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청옥산 기슭 고랭지 채소밭 근처에 지어진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 준수 아버지 어머니를 볼 수 있었는데, 두 분 다 허벅지까지 오는 노란 장화에 곡괭이를 든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검게 탄 얼굴에 조금 마른 편이었고, 어머니는 후덕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준수는 아버지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도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왔냐? 네. 친구냐? 네. 그게 전부였다.

내가 준수의 속마음을 알게 된 것은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왜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창업한다고 했던 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내일 아침 일찍 배추 출하해야 해.”

“진짜 좋은 기회여서 그래요, 아버지. 초기 자금만 도와주시면….”

알고 보니 준수는 다른 친구 두 명과 앱 개발 및 인터넷 홍보 대행사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아, 그래도 준수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구나…. 나는 말없이 반찬으로 나온 닭볶음탕을 우물거리며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닭볶음탕은 매콤하고 감칠맛이 났다.

“배추 뽑아서 기껏 대학 졸업시켜놨더니 무슨 또 돈을 대 달래! 취직해, 취직!”

“취직이 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세상인 줄 아세요!”

준수 부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얘도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 있었는데 취직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요! 이런 애들이 뭐 한둘인 줄 아세요!”

나는 젓가락으로 닭뼈를 뜬 채 쪽쪽 빨고 있다가, 그대로 멈춘 자세로 준수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준수 아버지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준수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끄응’ 소리를 한 번 내뱉었을 뿐이었다. 아아, 이거였구나, 이래서 나보고 함께 내려가자고 했구나….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는 준수와 함께 문간방에서 소주를 마셨다.

“너 그거 때문에 나보고 같이 오자고 한 거야? 사업 자금 때문에…?”

“아, 아니야… 아깐 그냥 아버지랑 얘기하다가 화가 나서….”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럼 말이라도 보태주잖아….”

준수는 손사래까지 치며 진짜 그런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고… 내가 진짜 부탁하고 싶은 건….”

준수는 그러면서 내일 아침 배추 출하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일당도 넉넉하게 챙겨준다고, 어차피 노는 거 용돈 좀 벌어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배추 출하?”

“도와드릴 건 도와드리고, 사업 얘기 다시 꺼내 보게… 너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나는 좀 화가 났고, 또 어이도 없었지만, 그것보단 서글픈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사업자금 때문에 친구를 인부로 쓰다니. 하지만 이미 닭볶음탕도 먹었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친구는 어떻게든 사업자금을 얻어내려고 하는 판국이니….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물어보았다.

“그래, 일당은 얼만데?”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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