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병원 ‘중증전환’ 이후 풍선효과
일부선 도수치료 등 고가 치료 권유
의료비 불균형-전달체계 왜곡 우려
상급병원이 진료를 거절하면 환자는 자연스럽게 개원가로 몰린다. 그러나 개원가 진료의 상당 부분은 비급여 항목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상급종합병원 ‘중증전환 사업’이 본래 취지와 달리 환자 불편과 의료비 부담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동아일보 DB
홍은심 기자최근 개원가에서 비급여 진료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피부미용 등 선택 진료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정형외과·마취통증의학과·재활의학과 등 근골격계 질환을 다루는 진료과에서 비급여 항목이 과도하게 청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환자 입장에서는 통증 완화나 기능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이어가지만 실손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누적되면서 의료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비급여 10건 중 7건, 개원가에서 발생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24년 3월분 의료기관 비급여 진료비 보고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의료기관의 비급여 진료비 규모는 1조8869억 원이었다. 이 중 의원급의 비급여 진료비는 69.7%인 1조3147억 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비급여 진료 10건 중 7건이 개원가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수가 정형외과·통증의학과 등 근골격계 진료에서 이뤄지고 있다.
진료 과목별로는 정형외과가 전체 비급여 진료비의 13.4%(2523억 원)로 내과(14.6%)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항목별로는 도수치료가 494억 원(11.7%)으로 가장 많았고 초음파(11.2%), 체외충격파(7.5%) 등이 뒤를 이었다. 대부분 척추·관절 통증과 관련된 치료 항목이다.
이 같은 통계는 근골격계 환자의 비급여 진료가 의원급에서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 강남구의 한 통증의학과 원장은 “허리 통증이나 목 통증으로 내원하는 환자 열 명 중 일곱 명꼴로 도수치료나 체외충격파 치료를 받는다”며 “회당 5만∼15만 원 수준인데 10회만 받아도 수백만 원까지 부담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상급병원 ‘중증 전환’, 경증 환자는 밀려난다
문제는 이런 진료가 단순히 과잉 진료로만 볼 수 없는 구조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상급병원이 중증 환자 중심으로 전환되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경증 또는 만성 통증 환자들이 상급병원 진료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부터 상급종합병원의 기능을 중증·응급환자 중심으로 재편하는 ‘중증 전환(구조 전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상급병원은 중증 환자 진료 비율을 기존 약 50%에서 70% 수준까지 높이도록 권고받고 비중증 외래 환자는 지역 병의원으로 회송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척추관협착증이나 목·허리 디스크처럼 만성 통증은 있으나 응급성이 낮은 환자는 상급병원 진료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부 병원에서는 디스크 환자의 외래 예약이 제한되거나 통증 치료 위주의 환자가 회송 대상에 포함돼 치료 연속성이 끊기기도 한다. 결국 환자는 개원가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개원가에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치료가 많고 그만큼 비용 부담이 크다. 도수치료나 체외충격파, 고주파·신경 차단술 등은 모두 비급여 항목이다. 효과와 근거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음에도 빠른 통증 완화를 이유로 권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성훈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이 많다 보니 개원가에서는 환자의 지급 능력에 따라 치료 수준이 달라지는 양상이 벌어진다”며 “이는 의료비 불균형뿐 아니라 의료전달체계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의 저수가 구조도 비급여 진료 확산의 중요한 원인”이라며 “공공의료기관인 일산병원조차 적자를 이유로 비급여 항목 확대를 요구받을 정도로 현행 수가 체계로는 정상적인 의료 운영이 어렵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비급여 관리’ 강화… 남겨진 환자들
정부는 올해 들어 과잉 우려가 큰 비급여 진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복지부는 5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비급여 적정 관리체계’를 신설해 의료적 필요도를 넘어 남용되는 비급여 항목을 ‘관리급여’로 전환하고 가격·진료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3월에는 ‘비급여 진료비용 등의 보고와 공개에 관한 기준’을 개정해 보고·공개 대상과 항목 범위를 확대하고 행정처분 기준을 강화했다. 비급여 진료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겠다는 것.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항목 표준화가 미비해 기관별 산정 기준이 다르고, 보고 자료의 실질적 비교나 통제가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한승범 고려대 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대한정형외과학회 이사장)는 “중증 전환 제도의 취지 자체는 타당하지만 그 이면에서 만성 통증 환자의 진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비급여 진료가 확산하는 문제를 동시에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급여화 확대와 비급여 항목의 표준화, 진료비 정보의 투명화가 동시에 추진되지 않는다면 의료비 불균형은 더 깊어지고 의료전달체계의 균형마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상급병원의 중증 전환 이후 척추·관절 등 만성 통증 환자는 중증도 기준에 막혀 상급병원에서도, 개원가에서도 완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진료받을 곳을 찾지 못한 채 비급여 치료를 전전하거나 비용 부담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는 환자도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증 중심의 효율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사이에 끼인 환자가 의료 체계 안에서 지속해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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