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불모지였던 한국에 공학기술 씨앗 뿌리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입력 2020-10-30 03:00수정 2020-10-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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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기틀 닦은 故최형섭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 업적 재평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는 1969년 10월 23일 준공식을 개최했다. 1966년 최형섭 박사가 소장으로 임명돼 설립을 추진한 지 약 3년 만이었다. KIST 제공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소장으로 재직한 고 최형섭 박사(1920∼2004)가 내달 2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최 박사는 KIST 설립과 초기 운영을 통해 국내 응용과학과 산업기술 개발의 기틀을 다져 한국이 산업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 박사는 2대 과학기술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전신) 장관을 맡아 국내 과학기술 행정과 정책의 뼈대를 세우기도 했다. 다음 달 2일 KIST에서 국내 과학기술사 연구자 등이 모여 그의 업적과 정체성을 살펴보는 학술대회를 여는 등 추모 열기가 퍼지고 있다.

○불모지에 ‘과학한국’ 씨앗 뿌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초기 연구원들과 함께한 최형섭 박사(앞줄 가운데). KIST 초대 소장으로 설립과 정착을 주도한 최 박사는 KIST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과학기술정책 모델을 확산시켰다. KIST 제공
최 박사는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노터데임대, 미네소타대를 거친 정통 금속공학자였다. 미국에서 연구하다 귀국해 금속연료종합연구소와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거치며 과학행정가로 변신했고, 1966년 KIST 초대 소장을 맡아 KIST 설립과 초기 발전을 주도했다.

최 박사가 활동하던 1960년대 초는 막 경제개발이 시작되던 시절이다. 공학과 기술, 공업의 존재감은 매우 낮았고, 특히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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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최 박사는 미래를 위해 기술개발이 중요하다는 소신을 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미국 방문을 앞두고 연구소장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섬유제품(스웨터)을 2000만 달러어치 수출했다고 자랑하자 “일본은 전자제품으로 이미 10억 달러를 수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하느냐.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최 박사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미국 측으로부터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 약속은 이듬해 최 박사가 KIST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가시화됐다.

처음엔 서울 청계천의 어물시장 옆 사무실에서 초라하게 시작했다. 최 박사는 이 공간을 거점으로 해외 과학 기술자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걸고 인재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교수보다 3배 많은 봉급을 주고 의료보험까지 제공하자 지원자가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가 아니라 기업에 필요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엄격한 기준으로 50여 명을 선발해 초기 KIST를 꾸렸다.

그는 단위연구실별로 기초에서 응용까지 자유롭게 연구하되 결과는 기업과 연계시키는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 정부의 지원을 받되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캐나다의 국가연구위원회(NRC), 자국에 필요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는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의 장점을 모아 KIST에 적용했다. KIST는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출범했고, 과학기술인의 위상도 크게 올라갔다.

○개도국 귀감 된 KIST 모델…새로운 발전전략 필요


KIST처럼 선도적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연구를 중심으로 선진기술을 빠르게 도입하는 모델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귀감이 됐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와 임재윤 서울대 연구원은 2017년 논문 ‘최형섭과 한국형 발전모델의 기원’에서 “최 박사의 과학기술정책론 작업은 이후 여러 국제기구 및 개발도상국에서 관심을 갖는 일종의 ‘한국형 발전모델’로 귀결됐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KIST 모델은 인도네시아와 요르단, 태국 등에 적용되며 명성을 얻었고, 최근에는 한국-베트남과학기술연구원(VKIST)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최 박사는 1971년 제2대 과기처 장관을 맡으면서 정부의 과학행정 및 정책 분야의 기틀도 다졌다. 대학의 기초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설립도 주도했다. 대덕연구단지 설립을 이끌고 정보산업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최 박사가 활동하던 때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으로 발전했다. 국가 연구개발(R&D) 투자는 세계 5위권이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비는 2014년 이후 세계 1, 2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로서 새로운 발전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R&D 예산을 확보하고 있지만 운영이 관료화됐고, 분절적 단기적 산업지향적인 연구에만 치중하고 있다”라며 “사회적 효용을 추구하고 종합적인 R&D를 지향하며 연구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과학기술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카이스트#과학#불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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