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쪼갠 ‘낙태 논쟁’, 중간선거 흔드나… 여론은 “낙태 찬성” 61%[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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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법원 ‘낙태권’ 뒤집는 판결문 초안 유출 파문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서 대법원 “낙태 금지는 위헌” 판결
‘돕스 대 잭슨女건강기구’ 사건서 최근 판례 무효화할 수 있는
판결문 초안 유출돼 논란 불붙여… 현재 대법관 9명중 6명은 보수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시민들이 5일(현지 시간) 주 의사당 앞에서 ‘로( 대 웨이드 판례)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 ‘내 몸,
 법은 손떼라’ 등을 적은 피켓을 들고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움직임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솔트레이크시티=AP 뉴시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시민들이 5일(현지 시간) 주 의사당 앞에서 ‘로( 대 웨이드 판례)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 ‘내 몸, 법은 손떼라’ 등을 적은 피켓을 들고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움직임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솔트레이크시티=AP 뉴시스
미국이 낙태권 찬반 논란으로 쪼개졌다. 2일 연방대법원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할 수 있는 판결문 초안이 이례적으로 유출된 후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계가 벌집 쑤신 듯 뒤집혔다.

여성의 자기 선택권 및 사생활을 중시하는 진보 진영과 여성계, 태아의 생명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 및 종교계는 연일 찬반 시위를 벌이며 이참에 낙태 관련 판례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집권 민주당은 보수 대법관이 우위인 현 대법원과 각을 세우고 있고, 현 사태를 11월 중간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삼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히면 매년 약 86만 건의 낙태가 시행되는 미국에서 불법 낙태 증가, 의료비용 상승, 취약계층 부담 강화 및 안전한 의료서비스 접근 제한 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주 법으로 낙태를 금한 일부 주에서는 낙태 희망 여성이 수백 km를 이동하거나 원치 않는 출산을 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보수 성향의 일부 주들은 경구 피임약, 사후 피임약 같은 피임도 금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안이 낙태에 그치지 않고 동성 결혼, 성소수자 권리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 ‘제인 로’ 노마 매코비

미 낙태권의 근간이 된 ‘로 대 웨이드’ 판례는 보수 텃밭으로 꼽히는 남부 텍사스주의 백인 여성 노마 매코비(1947∼2017)의 기구한 삶에서 시작됐다. 알코올 중독인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매코비는 16세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쳤고 알코올 및 약물 중독에 빠졌다. 그 여파로 첫째와 둘째 아이를 모두 입양 보냈다.

1969년 매코비는 셋째 아이를 가졌다. 출산을 원치 않았던 그는 경찰에 “강간을 당해 임신했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주 법이 강간 등의 피해로 임신했을 때 낙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낙태 허용 판정을 받지 못한 그는 앞선 두 아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날 아이를 또 입양 보내기 위해 입양 전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매코비는 그 과정에서 낙태 희망 여성을 대신해 소송을 준비하던 여성 변호사들을 만났다. 그의 변호인단은 1970년 매코비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으로 텍사스 지방 검사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한 소송을 냈다.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주 법이 미 수정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권을 침해한다며 “주 법은 낙태를 받기 위해 다른 주까지 이동할 여유가 없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잔혹하다”는 논리를 폈다. 법적 공방을 준비하던 매코비는 1970년 6월 딸 셸리 손턴을 출산했다. 이 셋째 아이 역시 입양을 보냈다.

양측의 법정 공방은 최종심과 헌법재판소 역할을 겸하는 미 대법원으로 왔다. 대법원은 1973년 “임신 기간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낙태 금지는 위헌”이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낮은 임신 초기에는 산모와 담당 의사의 결정권이 주 법에 우선한다고 본 것이다.

매코비-손턴 모녀의 사연도 화제다. 매코비는 판결 이후 자신이 ‘로’임을 밝혔고 낙태 클리닉 등에서 일하며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여성들을 도왔다. 그는 1994년 자서전 ‘나는 로입니다’를 출판했다. 바로 이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반낙태 운동을 이끌던 목사를 만나 복음주의 개신교도가 됐다. 이후 그는 낙태 반대 운동에 투신하며 “낙태권 소송에 참여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낙태의 아이콘’이 낙태 반대 운동을 펼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50년 가까이 자신의 존재를 감췄던 손턴은 지난해 자신이 로의 셋째 아이임을 처음 공개했다. 그는 19세 때 언론 인터뷰를 목적으로 자신을 찾았던 친모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했다. 매코비는 딸 손턴을 만나지 못한 채 2017년 요양원에서 심장 이상으로 숨졌다.

다만 손턴은 자신 또한 21세에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첫 임신을 했을 때 낙태를 택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동시에 낙태를 하려니 내내 원망하며 살았던 친모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아 결국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출산을 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서 낙태는 뗄 수 없는 부분”이라며 “친모가 자녀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남몰래 빌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 낙태 가능 시점 24주로 만든 케이시 판례
8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대가 낙태 반대 집회를 벌이고 있다. 메가폰으로 구호를 외치던 일부 시위
 참가자는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민들이 던진 초콜릿 우유 세례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AP 뉴시스
8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대가 낙태 반대 집회를 벌이고 있다. 메가폰으로 구호를 외치던 일부 시위 참가자는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민들이 던진 초콜릿 우유 세례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로 대 웨이드’ 판결 당시 미 대법원은 낙태가 가능한 시점을 임신 3개월로 규정했다. 이 시점은 1992년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판례를 통해 현재의 임신 24주로 늘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주는 낙태를 원하는 미성년자는 부모 중 한쪽, 기혼 여성은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시술 전 병원에서 24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자 ‘가족계획협회’라는 시민단체가 민주당 소속의 로버트 케이시 당시 주지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펜실베이니아주의 규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보장한 여성의 낙태 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또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기를 임신 24주로 보고, 24주 이후에는 여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주 정부가 낙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새 기준을 마련했다.

하지만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하는 시점, 과도한 부담의 정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됐다. 이로 인해 미 50개 주에서 주 법으로 새 낙태 규제를 도입할 때마다 대법원과 주 정부 간 갈등이 나타났다. 특히 2017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에 미 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가속화하고, 종신직인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대법관으로 채워지면서 논란 또한 증폭됐다.

2일 판결문 초안 유출에 담긴 사례 ‘돕스 대 잭슨여성건강기구’ 사건 역시 중부 미시시피주가 2018년 주 법으로 임신 15주 이후 낙태를 금지한 것에 반발한 시민단체 ‘잭슨여성건강기구’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뤄졌다. 이 법은 강간, 근친상간 등으로 인한 임신이라 해도 15주가 지나면 무조건 낙태를 불허해 많은 논란을 불렀다. 원고 돕스는 미시시피 보건당국을 대표하는 관료 토머스 돕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소송에서 미시시피주는 주 법의 정당성은 물론 ‘로 대 웨이드’ 판례의 위헌 여부 또한 물었다. 대법관 9명 중 보수 성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판결문 초안에는 ‘논리가 매우 약하고 미 사회의 분열을 심화했으므로 뒤집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 판례 뒤집히면 후폭풍 상당

미시시피주 법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은 빠르면 다음 달, 늦어도 7월 중에는 나올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면 미 사회에 상당한 후폭풍을 초래할 수 있다.

현재 미시시피 등 미 13개 주에서는 대법원 판결만 나오면 즉시 주 법으로도 낙태를 금하는 소위 ‘트리거 법’을 통과시켜 놓은 상태다. 장기적으로는 50개 주의 절반이 넘는 26개 주에서 낙태가 금지되거나 매우 강한 제한을 받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오클라호마주는 지난달 모든 낙태 시술을 중범죄로 간주하고 최고 10년형을 부과할 수 있는 주 법을 만들었다.

일부 주에서는 피임조차 금지할 뜻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소속인 테이트 리브스 미시시피 주지사는 8일 취재진이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은 후 주의회에서 피임 금지법을 통과시키면 서명하겠느냐”고 묻자 “다른 주에서 그런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 낙태권 옹호 연구단체 ‘굿마커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미국 내 낙태의 54%는 먹는 낙태약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7년(39%)에 비해 크게 늘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낙태에 반대하는 주를 중심으로 낙태 수술 허가 조건이 강화돼 먹는 약의 비중이 더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디언에 따르면 미 여성 경제학자 케이틀린 마이어스 미들베리칼리지 교수는 상당수 낙태 기관이 문을 닫을 것이며 남부 루이지애나주 여성은 낙태를 위해 최소 약 870km(약 539마일) 떨어진 곳까지 ‘원정 낙태’를 가야 한다고 예측했다. 그는 “낙태 희망 여성의 4분의 1은 원거리 이동을 할 수 없어 원치 않는 출산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취약계층 여성의 부담이 더 커진다는 것도 문제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낙태를 하는 여성의 49%가 빈곤선, 즉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저 소득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원치 않는 출산을 하면 ‘가난의 대물림’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낙태 금지가 여성 개개인의 삶의 질을 넘어 이들 자녀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유명 경제학자 출신인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10일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여성의 낙태권이 제한받으면 여성의 빈곤율이 늘고 이들이 출산한 자녀의 기대소득 또한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여성의 생식권 통제는 만족스러운 삶의 계획과 직결된다. 원해서 하는 출산인지, 아이를 키울 재정적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는 여성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결혼한 부부의 피임 등 사생활권을 보장한 1965년 ‘그리즈월드 대 코네티컷’ 판례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리실라 스미스 예일대 로스쿨 강사는 “낙태 반대 단체 중에는 ‘성관계는 결혼한 사람들의 출산을 위해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도 많다”며 피임, 합의된 성관계, 결혼권 등에 관한 기존 판례가 번복될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 11월 중간선거 최대 쟁점

여론조사 회사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2년 현재 미국에서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은 61%, 반대하는 사람은 37%다. 15년 전인 2007년 조사 당시 찬성(52%)과 반대(42%)에서 찬성 쪽이 더 많이 늘었다.

특히 지지 정당에 따른 찬성 비율을 보면 집권 민주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지난 15년간 찬성 쪽으로 이동했음을 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민주당 지지자의 63%가 “낙태를 찬성한다”고 했는데 올해 조사에서는 이 수치가 80%로 17%포인트 늘었다. 같은 기간 공화당 지지자의 반대 비율은 각각 39%, 38%로 별 차이가 없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 11월 중간선거에서 이를 옹호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며 이를 지지층 결집의 도구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후 줄곧 사법부와 각을 세운 그는 11일에도 “낙태권을 제한하면 동성혼, 피임 등도 위태로워진다”며 판례를 번복하지 말라고 대법원을 압박했다.

미 최초의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의장 또한 “낙태권을 지지하는 후보를 뽑고, 반대하는 후보를 낙선시켜 달라”며 가세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ABC뉴스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 혹은 공화당 성향의 유권자가 “중간선거에서 투표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민주당 지지층보다 10%포인트 높았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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