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국제

민간인 학살해 공포 극대화… ‘가짜뉴스-언론통제’로 진실 감춰[글로벌 포커스]

입력 2022-04-16 03:00업데이트 2022-04-17 08:44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그치지 않는 전쟁범죄 왜?
러, 피란통로 폭격-학교 공습 등… 우크라서 잔인무도한 행위 거듭
일각 “우크라 장악 아닌 절멸 목표”… 러, 체첸-시리아서도 민간인 학살
NYT “민간인 사망 용인전략 세워”… 피해 커지면 ‘협상 vs 저항’ 분열
1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 포스터를 들고 있다. 프랑크푸르트=AP 뉴시스
“전쟁에서도 규칙이 있다. 전쟁범죄는 이 최소한의 규칙마저 어긴 행위다.”

전쟁범죄(war crime)는 전쟁 중에 일어나는 각종 반인도적 행위를 뜻한다. 민간인 살해, 대량살상무기 사용, 강간, 고문, 부상병과 포로에 대한 적절하지 않은 처우 등이 대표적이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벌인 행위는 전쟁범죄의 교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차, 보로i카, 모티진 등에서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제노사이드), 피란민 이동 경로 폭격, 산부인과와 학교 공습 등 21세기 문명국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잔인무도한 행위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오나 힐 전 미국 백악관 고문은 최근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장악’이 아니라 ‘절멸’”이라며 그가 우크라이나인 말살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고 단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캄보디아, 옛 유고슬라비아, 시리아, 미얀마 등 세계 각국에서 전쟁범죄가 자행됐지만 러시아의 최근 행보는 수위와 강도 면에서 역대급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특히 상당수 전쟁범죄가 특정 국가의 내전 과정에서 벌어져 같은 나라 국민이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는 엄연한 주권 국가인 타국 국민을 상대로 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인종학살을 자행한 세르비아 지도자가 전범(war criminal)으로 법정에 선 것과 달리 폭주하는 푸틴 대통령을 처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다.
○ 전 세계서 전쟁범죄 잇따라
유엔이 정한 전쟁범죄의 요건은 △무고한 사람에 대한 고의적 살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의도적으로 지시 △민간인 인명 및 재산피해 △무방비 상태의 도시, 마을, 건물 등을 폭격 등 총 15가지다. 하나같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한 짓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런 전쟁범죄가 수차례 벌어졌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남부 밀라이에서 미군의 손에 민간인 약 500명이 숨졌다. 이웃 캄보디아에서는 급진 공산정권 ‘크메르 루주’가 1975∼1979년 당시 전 인구의 약 4분의 1인 최대 200만 명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1988년 쿠르드족에 국제법이 금지한 화학무기 ‘사린가스’를 사용해 역시 5000명이 사망했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다수파 후투족이 100일간 소수파 투치족 및 온건 후투족 80만 명을 살해했다. 별도의 성폭행 피해 여성 또한 최대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0년대 유고 내전은 전 세계가 전쟁범죄의 참상에 눈뜬 계기로 평가받는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앞세워 보스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등의 독립 요구를 탄압하고 곳곳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해 냉전 붕괴 이후 최악의 전쟁범죄자 겸 학살자로 꼽힌다.

그를 따르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무슬림 민간인 8000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유고 내전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 설립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유일한 ‘인종학살’로 인정한 사건이다.

세르비아계는 이슬람계가 많은 코소보가 1998년 독립을 요구하자 역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해 현재 약 8600명이 사망 또는 실종 상태다. 당시 코소보의 난민만 100만 명에 달했다. 2001년 권력남용 등으로 체포된 밀로셰비치는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종 결론이 나기 전인 2006년 헤이그 교도소에서 숨졌다.

지난해 2월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에서도 군부가 소수민족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미얀마군은 지난해 7월 중부 사가잉에서 민간인 40명을 살해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부차 집단학살의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손과 발이 묶인 시체가 여럿 발견됐다. 5개월 후에는 동부 카야주에서 불에 탄 40명의 주검이 발견됐다. 주민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일부 희생자는 산 채로 불탔다”는 끔찍한 증언을 내놓았다. 유엔은 쿠데타 발발 후 1년간 최소 1600명이 사망했으며 미얀마군이 인구 밀집지역에 중화기를 사용한 정황이 다수 발견됐다고 규탄했다.
○ 러, 체첸-시리아 때부터 민간인 학살
러시아군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푸틴 대통령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이며 과거 체첸, 시리아 때도 널리 쓰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의 민간인 대상 범죄가 본격화한 것은 제2차 체첸 전쟁 때부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군이 최근 부차 등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에 대해 “2000년 체첸에서 벌인 ‘자치스트카(Zachistka·청소)’의 완벽한 재현”이라고 평했다.

1999년 당시 러시아는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장악하려 했지만 함락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도시를 포위하고 이듬해 초 일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민간인 수천 명이 사망했고, 그로즈니는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됐다. 82명의 민간인은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됐다. 지난달 초부터 러시아군이 포위해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 봉쇄의 모델이 그로즈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는 2011년 발발한 시리아 내전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화학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공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아사드 정권은 2013년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사린가스를 사용해 민간인 1400명을 숨지게 했다. 2017, 2018년에도 각각 사린가스와 염소가스를 투하해 최소 87명, 1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러시아군은 정부군을 동원해 반군에 국제법이 금지한 ‘진공폭탄’ 등 각종 대량살상무기도 사용했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푸틴은) 과거에도 군사 작전을 벌일 때마다 국제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더럽혔다”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며 고의적으로 민간인과 민간물자를 겨냥한 것은 전형적인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시리아 전쟁의 유산이 푸틴 대통령에게 폭력을 적절히 사용하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려준 셈이라고 진단했다.
○ 상대국 공포 극대화 및 분열 노려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러시아를 규탄하고 초강력 제재를 가하고 있음에도 푸틴 대통령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유는 전쟁범죄가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힌다는 점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NYT에 따르면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군사 전략가 알렉세이 아르바토프는 “러시아는 민간인의 사망을 용인하는 전략을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민간인 사망자가 늘어나면 상대국의 저항 의지를 손쉽게 꺾고 공포와 두려움을 확산시킬 수 있다. 상대국의 분열도 부추길 수 있다. 민간인 피해가 커질수록 여론 또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협상하자’는 쪽과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쪽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주변국에도 부담을 안길 수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경을 넘으려는 피란민들이 증가해 주변국 또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탓이다.

폭력을 부추기는 러시아 군대 특유의 ‘데도브시나(dedovshchina)’ 문화 또한 러시아 병사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전쟁범죄를 자행하도록 만든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데도브시나는 신병의 정신과 신체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자행되며 구타, 집단 폭행, 성폭력 등이 빈번하게 자행된다. 미 CNN은 우크라이나 침공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 군대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문화로 유명했다고 지적했다.
○ 러 국민이 나서야 단죄 가능하나 난망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4일 푸틴 대통령을 전범 재판에 회부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12일에는 러시아의 침공 후 처음으로 러시아군의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줄곧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군 전 지휘관은 물론 민간인 공격 명령을 내린 모든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

푸틴 대통령을 단죄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ICC에 세우는 것이다. ICC는 지난달부터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위반 수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ICC가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어 전범 용의자를 체포하려면 해당국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미 2016년 “ICC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탈퇴했다. 특히 ICC는 결석 재판을 열지 않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자국에서 체포되지 않는 한 재판을 진행할 수 없다.

유고 내전, 르완다 대학살 당시 국제사회는 전범을 기소하기 위해 특별 ICC를 일회성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특별 법정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설립된다. 역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쓰면 불가능하다.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이 ICC 법정에 선 이유도 그가 민중 봉기로 실각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단죄하려면 러시아 국민이 현실을 깨닫고 푸틴 대통령을 몰아내야 가능하다. 가디언은 “전쟁범죄와 잔학 행위를 가장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해당 국가의 국민”이라며 수만 명의 러시아인이 거리에서 전쟁 반대를 외치는 것이 잔혹한 행위를 막는 최선의 도구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푸틴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는 굳건하다. 모스크바의 여론조사회사 ‘레바다센터’가 침공 후 최초인 지난달 31일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3%는 ‘푸틴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직전 조사인 1월(69%)보다 14%포인트 올랐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을 때도 지지율 급상승을 경험한 바 있다. 2000년 집권 후 22년간 강력한 언론 통제를 통해 서방을 악마화하고 전쟁범죄를 ‘가짜뉴스’ 혹은 ‘우크라이나 내 나치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감옥에 갇힌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제외하면 푸틴에 대항할 만한 정치인도 전혀 안 보인다.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는 “체첸전쟁 때는 체첸군 또한 러시아에 테러를 저질렀고, 시리아에는 직접 지상군을 파병한 것이 아니어서 일반 러시아인은 두 사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현재는 대다수 러시아 국민이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러시아계를 탄압하고 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선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푸틴 정권의 주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분석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파리=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파리=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국제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