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낙태-동성결혼 반대하는 美보수의 중심… 4년전엔 트럼프에 몰표

김예윤 기자 , 이설 기자 입력 2020-10-17 03:00수정 2020-10-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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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정치를 움직이는 손 ‘복음주의 기독교인’
2016년 11월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생명을 지켜라’ 등의 팻말을 들고 낙태 반대 집회를 열었다. 당시 이들은 5개월 전 대법원이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에 위헌 결정을 내리자 이에 반발해 행동에 나섰다. 워싱턴=AP 뉴시스
약 2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앞두고 대선 때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복음주의 기독교인(Evangelical Christian)’이 주목받고 있다. 미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보여 왔고, 강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바탕으로 일반 유권자보다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한다. 대선 같은 대형 정치 행사를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작은 정부, 총기 자유화 등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2004년 대선과 2016년 대선에서 모두 공화당 후보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79%)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81%)에게 몰표를 던져 당선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사후 불과 8일 만에 낙태 반대론자인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한 것도 핵심 지지층인 이들의 지지가 재선에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바이블벨트 거주하는 백인 보수층

전미복음주의연합(NAE)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다. 역사가 데이비드 베빙턴은 △성경주의(성경이 절대적 기준) △십자가 중심주의(예수의 희생을 강조) △회심주의(성경에 의한 거듭남을 강조) △행동주의(사회 참여)를 복음주의 특징으로 꼽았다. 미 리서치회사 바나그룹은 ‘성서의 모든 것이 정확한가’,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오늘날에도 지배하는가’ 등 총 9개 질문에 모두 ‘예’라고 답하는 사람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했다.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약 25.4%가 복음주의자다. 올해 미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전체 인구 3억3354만 명을 기준으로 하면 약 8472만 명이 복음주의자로 추정된다는 뜻이다. 인종별로는 백인(76%)이 가장 많고 히스패닉(11%), 흑인(6%) 등이 뒤를 잇는다. 연령대는 30∼49세(33%), 50∼64세(29%), 65세 이상(20%), 18∼29세(17%) 등으로 중장년층이 대다수다. 성별은 여성(55%)이 남성(45%)보다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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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수준은 고등학교 졸업 이하(43%) 및 대학 교육 일부 경험(35%)이 78%를 차지하고 있다. 또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보수(55%)라고 여기는 사람이 진보(13%)라고 답한 사람보다 많다. 이들은 낙태와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사형제, 총기 보유,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 감세, 가정의 가치 등을 중시한다. 라이프웨이연구소의 올해 3월 여론조사에서 복음주의자의 73%가 “성(性) 정체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켄터키, 앨라배마, 미시시피, 아칸소, 오클라호마, 미주리 등 미 남동부에 주로 거주한다. 이 지역은 19세기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연합에 속했으며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이 많아 ‘바이블 벨트’로도 불린다.

○ 조직력·결속력 앞세워 높은 투표율

복음주의자들은 대선 때마다 높은 투표율을 보여왔다. 2016년 대선 당시 복음주의자의 투표율은 61%로 전체 유권자(55.7%)보다 높았고 무신론자(40%)와는 21%포인트 차이가 났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교회는 사회의 어떤 단체보다 조직력이 강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신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결속과 단합이 더욱 굳건하다고 김 연구원은 설명했다.

투표에 적극적인 이유는 낙태 등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첨예하게 찬반이 갈리는 사안에 대해 여론 우위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이념을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오르고, 또 그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을 많이 지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복음주의자를 자처하거나 복음주의자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이들이 선호하는 방향의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대표적 예가 인디애나 주지사 재직 시절 각종 낙태 금지법을 제정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다. 그는 낙태를 한 여성이 반드시 태아의 시체를 매장하도록 규정한 법을 제정하는 등 각종 낙태 금지 주(州)법을 만들어 논란을 불렀다. 몇몇 법안은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하원의원 때도 의회 연설에서 창조론을 설파했다. 스스로를 “공화당원 이전에 기독교인”이라고 한 발언도 유명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캔자스주 하원의원 당시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장관이 된 후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등 유대계 인사들과 손잡고 친(親)이스라엘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01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은 2015년 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내리자 “미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24시간”이라고 반발했다.

기업인 중에서는 캘리포니아의 금융재벌 하워드-로버타 아만슨 부부가 유명하다. 이들은 2008년 주 내에서 동성결혼 금지를 위한 발의안을 제정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공화당 정치인의 당선 등을 위해 별도로 수백만 달러를 내놨다.

○ 1970년대부터 美 정치에 영향력 커져

복음주의가 미 정계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1973년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내리자 낙태를 죄악시하는 복음주의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1918∼2018), 제리 폴웰(1933∼2007), 팻 로버트슨(90) 등 ‘대형 교회(Mega church)’를 운영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당시 대통령이던 공화당 소속의 리처드 닉슨을 움직여 이 판결을 무효화하려 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닉슨이 하야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종교 지도자와 워싱턴 정치인 간의 긴밀한 유대가 맺어지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레이엄 목사와 로버트슨 목사는 각각 닉슨 정권과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4년 해외의 낙태 시술을 지원하는 미 비영리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금지했을 때도 복음주의자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로버트슨 목사는 아예 1988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직접 나섰다.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이 세속국가로 변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낙태 허용이라고 지적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정치는 종종 반대파와 타협해야 하지만 이들은 낙태 문제를 선과 악의 대결로 인식한다”고 진단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집권 1기였던 2003년 찬반 논란이 극심했던 ‘부분 출산’(태아의 머리나 몸통 일부를 먼저 꺼내는 낙태 방식)을 금지했다. 낙태 반대파는 이 방식이 매우 잔인하며 사실상의 영아 살해라고 반발했다. 찬성론자들은 감염 위험이 적고 산모에게 안전한 시술이라고 반박했지만 부시 정권은 밀어붙였다.

○ 트럼프의 반(反)낙태 정책 선호


트럼프 대통령은 세 번 결혼했고 여러 차례 성추문에 휩싸였다. 이상적 가정을 꿈꾸는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지 않을 법한 정치인인데도 왜 몰표를 받을까. 트럼프 대통령의 사생활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가 2017년 집권 이후 줄곧 반낙태, 반이민 정책을 펴며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구현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 교수는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주류는 대선 때는 집권을 위해 지지를 호소하면서 막상 백악관 주인이 되면 민주당과 타협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달랐다’고 여긴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외연 확대, 중도 확장 등을 포기하고 오로지 지지층을 위한 ‘집토끼 올인’ 정치만 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중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다. 집권한 지 석 달 만인 2017년 4월 닐 고서치, 2018년 10월 브렛 캐버노, 지난달 배럿을 골랐다. 각각 지명 당시 나이는 50세, 53세, 48세에 불과해 60대 이상이 많았던 전임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과 상당한 대조를 보였다. 세 사람은 모두 보수 성향이 강하며 낙태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종신직인 미 대법관의 특성을 이용해 본인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수십 년간 대법원의 보수화를 이끌 인물을 앉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캐버노 대법관은 인준 과정에서 대학 시절 성추문 의혹이 불거져 미 전역에서 거센 반대 시위가 일어났는데도 상원 다수당이라는 공화당의 지위를 이용해 가까스로 인준을 통과시켰을 정도다. 반대파에는 ‘분열과 증오의 정치’이지만 지지층에는 ‘우리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김 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반(反)오바마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유라고 진단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도입한 건강보험 개혁 정책 ‘오바마케어’는 기업이 직원들에게 피임 및 낙태 관련 비용을 지급하도록 의무화했다. 또 오바마 집권 8년간 종교단체에 대한 세금 혜택이 많이 줄었다.

○ 2020 대선의 변수 될까

이들의 정치 성향과 그간 투표 이력을 감안할 때 복음주의자들이 올해 대선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퓨리서치센터는 “올해 대선에서 백인 복음주의자의 82%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할 것”으로 점쳤다.

다만 이들의 몰표가 2004년과 2016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대선 승자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 관측이 있다. 우선 4년 전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와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지지율 격차보다 현재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와 트럼프 대통령의 격차가 더 크다.

독실한 가톨릭임을 강조하는 바이든 후보가 다른 민주당 정치인보다는 낙태 찬성에 소극적이며 가정의 가치를 중시해 복음주의자의 적대감이 덜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안 교수는 “4년 전 대선에서 특히 백인 여성 복음주의자들이 클린턴 후보에게 큰 반감을 보였지만 바이든 후보에 대해서는 반감이 작다”고 진단했다.

마리 그리피스 미 워싱턴대 교수 역시 최근 미 역사협회 연설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페미니즘, 기후변화, 이민, 인종차별 사안 등에서 기성 복음주의자와 다른 시각을 보인다. 복음주의자 내에서도 상당한 세대 변화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예윤 yeah@donga.com·이설 기자
#2020 미국 대선#복음주의 기독교인#트럼프#낙태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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