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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7월 2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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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서양인들이 일본 앞바다에 큰 배를 끌고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자 일본의 국론은 분열됐다. 왕을 중심으로 단결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쇄국론이 우세했고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쪽은 소수였다. 사카모토의 걸출한 면모는 이런 양 극단을 통합해야 일본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점이다.
한국과의 교류 되돌려서야
그래서 그는 무능한 도쿠가와 정권의 타도에 나서면서 개방과 국제화를 동시에 추구했다. 그는 모호한 태도로 비판받기도 했으나 일본의 근대화는 그의 혜안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를 ‘역대 최고의 인물’로 뽑은 일본인들도 현실주의적 면모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한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일본의 전략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청소년 교류에 공을 들이고 한국이 일본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도록 끈질기게 일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한국의 거부감이 당장 해소될 수 없는 일이므로 몇십 년 후를 기다리겠다는 포석이었다.
최근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후 주한 일본대사관이 한국 거주 일본인에게 이례적으로 ‘반일 집회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하라’는 e메일을 보낸 것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의 이번 분노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도 되지만 그만큼 한일 간의 인적 교류가 전보다 크게 진전됐다는 뜻도 된다.
한국 법무부에 물어보니 국내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일본인은 1만8399명에 이른다. 1995년 9365명에 비해 10여 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국내 거주 미국인 2만622명에 육박한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방문객 수는 지난해 480만 명을 기록했다. 일본을 찾은 한국인이 260만 명, 한국을 찾은 일본인이 220만 명으로 한국인이 일본을 더 많이 찾는 역전 현상이 눈길을 끌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두 나라의 연간 방문객 규모는 1만 명이었다. 40여 년 만에 하루 1만 명이 오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전국 127개 지자체가 일본 지자체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일본 드라마, 음악, 음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 서울에 속속 등장했고 한국 프로야구에 일본인 선수와 코치들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규슈의 골프장이나 온천에서 한국인 찾기가 어렵지 않다. 도쿄의 회전초밥 집이나 박물관에선 배낭여행 온 한국 대학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공통점과 지리적 근접성, 빈번한 무역교류 등 여러 배경이 겹쳐지면서 서로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공존의 길로 들어섰다.
‘독도는 한국의 자존심’ 이해해야
일본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기술(記述)이 포함된 데는 일본 우파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들 하지만 정말 그런지 납득하기 어렵다. 일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일본 내의 ‘애국심’과 ‘대외홍보 효과’ 정도일 터인데 지금껏 우여곡절을 겪으며 쌓아 온 한일 관계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현실주의자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은 상대방도 나처럼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독도는 단순한 영토 문제일지 모르지만 한국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존심이 걸려 있는 일이다. 일본이 그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사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 한일 관계를 과거로 되돌리기에는 두 나라가 너무 멀리 와 있다. 일본은 새로운 현실주의 감각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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