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메일]내가 만난 두 여배우 심은하-전도연

  • 입력 2000년 4월 3일 11시 51분


요즘 영화계에서 가장 주가가 높고 관객들로부터도 사랑받는 여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심은하와 전도연이 아닐까요.

갑자기 여배우들 이야기가 하고싶어진 건,얼마전(4월1일) 영화 '인터뷰'가 개봉되던 날 었던 심은하와의 인터뷰가 아주 인상깊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내 마음의 풍금'과 '해피 엔드'때 인터뷰를 했던 전도연도 떠올랐습니다.

둘 다 좋지않은 소문도 꽤 많은 배우들이지만 전 두 사람을 만나면서,사람이 한 가지 일에 대해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파고들면, 그 분야에 대한 자기 철학같은 걸 갖게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토요일이었던 4월1일은 아주 봄볕이 좋은 날이었는데, 하늘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심은하는 화장기도 별로 없는 뽀송뽀송한 얼굴이었지만,정말 화사했습니다. 저 사람에 비해 나는 얼마나 초라한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저절로 감탄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기자들에게 배우 인터뷰는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번 똑같은 질문에 배우들도 지쳐서 그렇겠지만, 판에 박힌 '정답'만 듣기 일쑤인 경우가 많아요. 언젠가는 어떤 남자배우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한 말이 똑같이 다른 신문에 나온 걸 보고 황당했던 적도 있었답니다. 기자에게도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은근히 '배우가 알면 뭘 알겠나,감독이 알겠지'하고 얕보는 심리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같네요.

심은하를 만난 날도 마뜩치 않은 기분으로 별 기대없이 갔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아주 소탈하고 유쾌하고 자기 생각이 분명한 배우였습니다.

실제 모습은 '청춘의 덫'에서처럼 조용하고 좀 까다로울 것같은 여자가 아니라 '미술관옆동물원'의 소탈한 춘희쪽에 더 가까워 보였어요. 심은하를 "언니라고 부르던 영화사 기획실 직원은 "호탕하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니까요. 말을 하다가 옆에 앉은 사람을 툭툭 치며 동의를 구하고 자기가 먼저 질문을 하기도 하고,예전의 실수에 대해 말을 꺼내면 변명하려 들지 않고 "실수죠,뭐. 실수는 실수인 거지"하고 대범하게 넘어가더군요.

언젠가 한 번 포장마차에 갔다가 사람들이 자길 알아봤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알아보기 시작하면 전부 와서 만지고, 정말 깨물지만 않았지 다 갖다 대요. 그 때부턴 닭똥집도 못먹어요. (갑자기 우아한 태도와 목소리로) '우동 주세요'해야죠"하고 말할 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었어요.

데뷔할 때와 지금의 심은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데 엄마와 동생 반야의 영향이 큰 것같습니다. 반야는 정말 그에게 의지가 되는 동생인 듯합니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전날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 반야가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고 울어서 좀 부은 얼굴로 나타났어요. 동생 덕택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알게됐고 그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박수근,김환기,남관의 그림을 자주 본다더군요.

"이제 '심은하의 영화'를 할 때는 지났다, 작품 속에 녹아들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진지하게 설명할 때는 아, 저 사람이 어느 한 고비를 힘겹게 넘기면서 얻은 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배우는 평생 배우다. 배우를 그만둬도 나는 '배우 심은하'로 남을 건데, 더 강해지고,똑똑해지고 싶다" "작품만 좋다면,해볼만한 시도라면 개런티에 상관없이 출연할 마음이 있다"고 말한 자신의 바람을 꼭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연은 볼 때마다 아직 영화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열일곱살 늦깎이 초등학생 역을 맡았던 '내 마음의 풍금'때는 단발머리를 나폴거리며 신문사 복도를 경쾌하게 뛰어 와서는 까르르 웃으며 "나,엄마 옆에서 김치 담그는 거 너무 좋아해요"하고 귀여운 막내처럼 굴더니, 바람난 30대 주부 역할을 맡은 '해피 엔드'때에는 목소리조차 촉촉해져서 "오르가슴에 견줄만큼 커다란 희열",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해 사람을 놀래키더군요.

심은하에게 주변의 다른 배우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면 전도연에게선 독기같은 게 느껴집니다.

'내 마음의 풍금'을 촬영할 때 물에 빠진 닭을 구하려고 전도연이 계곡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하10도의 추운 날씨 때문에 물에 빠진 닭이 두 마리나 죽었는데도 전도연은 아무 소리 않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연기를 해서 주변 사람들이 전부 그 지독함에 놀랐다고 합니다. '해피 엔드'에서 베드씬을 촬영할 때도 차마 여기 다 쓸 순 없지만, 맡은 배역을 그대로 살아내려는 독기가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한 온갖 에피소드들이 많았지요.

정상급 여배우로는 드물게 과격한 변신을 서슴지 않는 그에겐 어느 쪽을 맡아도 영민하고 연기 욕심이 많은 '전도연다움'이 있습니다. "연기를 잘 못하면 너무 화가 나서 혼자 운다"는 그는 자기가 결혼을 하면 결혼생활과 일을 함께 하는 건 못할 것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밖에 할 줄 모른다"고. 그 한 가지밖에 할 줄 모르는 집중력과 몰두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 속의 그를 보며 따라 울고 웃는 즐거움을 얻게 되는 듯합니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역할을 꾸며내는 듯한 배우는 스타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배우가 자신의 인격을 주인공에 부과하고, 주인공이 그 인격을 배우에게 부과하는 '이중인화'를 통해 스타가 탄생한다고 했지요. 오늘날의 스타 심은하와 전도연이 나오게 된 건, 그들이 맡은 배역의 아우라(Aura)가 큰 이유도 있겠지만, 그 역할을 다른 배우가 맡았다고 해도 그만큼의 결과가 나올지는 의문이네요. 어쨌든, 아직은 완성된 그릇이라고 할 순 없어도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고 '연기'에 인생을 건 듯한 배우, 몰두가 지나쳐 때론 현실의 자신과 극중 자신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정말로 '살아내는' 배우가 있다는 건 관객에게도 행복한 일이 아닐런지요.

김희경<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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