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의사, 국제재판서 日만행 세계폭로 노렸다"

  • 입력 2004년 8월 12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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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관리증언 녹취록
총독부 관리증언 녹취록
《조선총독부 전직 관리들의 육성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1952년 민간재단인 우방(友邦)협회의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전 조선총독부 식산국장·사망) 이사장이 와세다대의 조선사 강사인 미야다 세쓰코(宮田節子)에게 제의해 이뤄졌다. 미야다씨는 강덕상(姜德相) 시가(滋賀)현립대 교수 등 연구자들을 모아 1958년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연구회는 1962년까지 500여 차례에 걸쳐 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을 비롯한 전직 관리들의 증언을 녹음했다. 현재 확보된 테이프는 모두 418개. 가쿠슈인대 동양문화연구소는 이 중 일부를 녹취해 2000년 8월 아사히신문을 통해 공개했으며 당시 동아일보도 보도한 바 있다. 이번 자료는 그 후속 작업에 해당한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테이프가 남아 있지만 일단 작업을 마무리한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이 증언록은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거액을 요구한 매국노 송병준의 행각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러 재판정에 서고자했던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아침,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哈爾濱)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이 튀어나와 저격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안중근

조선에서는 이토를 살해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논의 끝에 안중근이 ‘내가 하겠다’고 나섰고 우덕순(禹德淳)과 또 한명 등 3명이 하얼빈에 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살해하면 국사범(國事犯)이 되기 때문에 러시아 당국에 구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에 호의를 보이기 위해 안중근을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 넘기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안중근은 일본의 재판을 받게 됐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을 선택한 것은 신병이 일본에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왼손 무명지는 첫 번째 관절부터 잘려 있다. 이는 7명의 동지가 ‘단지(斷指)동맹’(안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12명)을 맺으면서 잘랐기 때문이다.(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부장을 지낸 아이바 기요시·相場淸)

△일사학자 최서면(崔書勉)씨〓“안 의사는 러시아를 통해 국제재판에 회부되면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이토의 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의거 후 총알이 1발 남은 데 대해 일본 검사가 ‘자살용이냐’고 묻자 ‘내가 왜 죽느냐. 나의 남은 사명은 일본의 계략을 세계만방에 폭로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김구

▼항일 무장투쟁의 '핵' 김구▼

조선의 민족운동에서 특수한 인물은 만주사변 후 중국 난징(南京) 또는 충칭(重慶)에 근거를 둔 김구였다. 그가 지도한 항일운동은 테러 또는 일본으로의 잠입을 통해 이뤄졌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이 요요기(代代木)연병장의 관병식(觀兵式)때 ‘각하(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또 윤봉길(尹奉吉)이라는 청년이 그해 4월 29일 천장절(天長節·천황 생일)에 상하이(上海)에서 식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이들은 중국 등 외국을 무대로 반일활동을 했다. 이 활동의 불똥이 상하이로 튀어 중국의 반일 기세와 맞물렸다. 조선인을 수하로 한 항일운동 또는 조선인 스스로의 항일테러가 잇따랐다.

원흉은 김구였다. 대역사건이므로 사방에서 김구를 해치우기 위해 움직였다. 군과 외무성 등 모든 기관이 김구에 집중했고 각 방면에 돈을 상당히 쏟아 부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스파이를 썼지만 이들로부터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보는 즉시 사살하라고 했으나 실패했다.(함경북도 경찰부장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

△독립기념관 연구소 조범래 연구원〓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총독부가 선생을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송병준

▼뻔뻔한 매국노 송병준▼

송병준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가쓰라 다로(桂太郞) 총리에게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길 테니 1억5000만엔을 내라”고 교섭해 왔다. “1억5000만엔으로 조선을, 이만큼 넓은 토지와 2000만명의 인구를 모두 일본인의 손에 넣을 수 있지 않는가. 조금도 비싸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1894년 그가 대신을 그만두고 도쿄(東京)에 와서 가쓰라 총리에게 한일병합론을 꺼냈다. 총리가 “시행은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1억엔만 있으면 훌륭히 할 수 있다. 조선 땅과 2000만명의 인구에 대한 대가로 수십, 수백억엔의 세금이 생겨난다. 너무 싸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3000만엔밖에 들지 않았다.(재무국 사무관 후지모토 슈조·藤本修三)

송병준은 3·1운동을 계기로 시작된 ‘문명정치(문화통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미즈노(水野) 총독부 정무총감이 임명된 직후 접견에서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러시아의 연방제 형태를 희망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병합 때 일본이 한국측에 지불한 돈이 너무 적다. 이번에 100만엔을 받고 싶다”고도 했다. 총감은 이를 거부했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료·千葉了)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원〓“송병준이 한일병합 이후 재산을 불려나간 점을 감안할 때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유추할 수 있지만 1억5000만엔을 요구했다는 것은 처음 나온 얘기다.”

이승만

▼초기 임정과 불화說 이승만▼

한일병합 두 달 후인 1910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시베리아를 경유해 5년 만에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진정하는 활동을 하다 대서양을 건너 런던-파리-레닌그라드를 거쳐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만주로 온 다음 평양에서 부모를 만난 뒤 경성에 잠입했다.

그해 11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평안남도 순시를 틈타 총독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각됐다. 윤치호 등이 주모자 격이었으나 배후조종은 이승만 주변에서 이뤄졌다.

경찰은 이승만을 체포하려 했으나 해리스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체포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추방 조치로 마무리됐다. 추방당한 이승만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권했다.

3·1운동에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은 임정의 파벌싸움을 수습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이동휘 안창호 등 반대파가 암살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여관을 전전하다 몰래 배를 타고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이승만은 이후 안창호가 미국으로 오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했다.(쓰보에 센지(坪江汕二) 외무성 경관 겸임 경찰)

△독립기념관 연구소 조범래 연구원〓 “‘이승만이 임정의 파벌싸움을 수습하러 상하이에 갔다’는 증언은 사정을 잘 모르는 당시 일본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당시 임정 내부가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승만은 오히려 파벌 싸움을 조장했다는 게 중론이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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