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에 평화올까?]美-英-러 국제감시단 구성 합의

  • 입력 1998년 7월 6일 19시 56분


신유고연방의 코소보주 사태는 국제사회의 온갖 외교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중재안을 내놓아 평화가능성이 엿보이는듯 하다가 곧바로 유혈사태가 재개되는 등 혼미가 계속되고 있다. 6일 미국의 리처드 홀브룩 코소보 중재담당특사는 신유고연방주재 미국 러시아 영국 대사가 국제감시단을 구성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코소보를 국제사회의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해 국제감시단이 우선 ‘상징적인’ 수준의 순찰업무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으나 평화가 쉽게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코소보는 그만큼 뿌리깊은 갈등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코소보의 역사〓14세기 전반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는 대(大)세르비아가 다뉴브강에서 그리스중부에 이르는 거대국가를 건설, 발칸반도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리스정교를 신봉하는 세르비아는 가톨릭국가인 합스부르크제국과 이슬람국가인 오스만 터키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외침을 받았다. 마침내 1389년 코소보 주도인 프리슈티나 일원에서 세르비아의 10만 대군이 터키군에 의해 완전 궤멸당한 뒤 4백여년 동안의 혹독한 이슬람 지배가 시작됐다.

이후 세르비아인은 이곳을 ‘성지(聖地)’로, 또 외침에 대한 저항의 지주로 삼고있는 곳이다.

세르비아는 1833년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의 도움으로 터키권에서 벗어났으나 1908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의 영토 보스니아를 강제 합병하면서 또다시 점령당한다.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인은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중인 페르디난드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를 암살, 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댕겼다.

▼2차대전 후의 코소보〓전후 티토가 6개 공화국을 합친 대유고연방을 창설했을 때 민족갈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민족주의세력을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84년 티토가 사망하고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90년 유고연방이 해체되자 민족갈등이 표면화됐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도 이때부터 독립을 요구했고 이에대해 세르비아는 코소보에 대해 ‘자치’까지 박탈했다. 그러자 알바니아계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무장세력을 조직해 세르비아에 대항하고 있다.

▼주변국의 개입과 향후 전망〓2월말 세르비아계의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 때문에 갈등이 격화하면서 현재까지 3백여명의 사망자와 6만5천여명의 알바니아계 난민을 낳았다.

유럽 각국과 미국은 6월 신유고연방에 경제제재를 추가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세르비아인은 “코소보가 ‘유럽의 베트남’이 될지언정 우리가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윤희상기자〉he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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