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내 심화되는 디지털 의존의 일상화
함께 있어도 깊어지는 가족 간 심리적 단절
대화 감소로 공동체 기능 기반 약화 초래
상호 관찰과 배려가 관계 회복의 출발점
이은경 전 초등 교사·‘도파민 가족’ 저자
주말 오후, 남편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둘러보니 주변은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화면에 빠져버린 사람들로 조용했다.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순간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풍경은 이제 우리가 머무는 공간 어디서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옆 주차 등록, 매장 안내 등의 안내문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 글자씩 더듬어 읽고 있었다.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듯, 알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임에도 그 또렷한 집중력과 호기심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바라보며 웃고만 있기엔 안타까운 장면이 펼쳐졌다.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이 옆 아빠의 손에는 당연히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는데, 화면에는 평소 나도 즐겨 보던 예능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고 놀랍게도 양쪽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아빠, 이 글씨 뭐야?”
모르는 글자를 발견한 아이는 몇 번이나 아빠를 올려다보며 도움을 청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묵묵부답인 아빠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끝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운함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아이의 표정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이의 그 표정을 아이의 아빠는 정작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가족이 함께 있다고 어떻게 내내 서로만 바라보며 빠짐없이 반응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런 거대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어딘가 좀, 무언가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는 제언이다. 가족이란 본래 함께 머물며 서로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공동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던 기색, 작은 행동의 변화로도 감정을 읽어내던 시간의 힘이 있었다.
그랬던 가족이 달라지고 있다. 전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지만, 각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가는 중이다. 식탁 위에는 대화 대신 스마트폰 화면이 분주하게 교차하고, 거실에는 서로 다른 화면이 재생 중이다. 가족의 물리적 거리는 여전히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는 중이다. ‘함께 있음’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한 공간에 있어도 서로를 관찰하지 않고, 듣지 않으며,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게 가족의 온도가 서서히 식어가는 중이다. 책임보다는 편안함을, 대화보다는 침묵을, 기다림보다는 각자의 속도를 선택한다. 가족의 기능은 여전하지만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책임만 남고 말 텐데, 그래도 정말 괜찮을까.
각자의 화면에 몰두한 가족에게 생길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관심의 방향이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나누는 언어의 온도, 시선의 빈도, 함께 머무는 시간의 질이 모두 낮아지고 있다. 알고리즘이 대신 추천해 주는 정보와 취향 속에서 가족 간의 소소하고 우연한 대화와 마주침은 설 자리를 잃는다. 관계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느슨해져 있다.
문제는 그 느슨함이 깊어질수록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가족의 헐거움은 어느 날 불쑥 당해버린 억울한 사고가 아니다. 또한 헐거워지는 가족은 누구 한 사람의 탓만도 아니다. 각자가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너무 바쁘고 팍팍하다. 회사와 학교, 사회의 속도에 맞춰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집 안에서만이라도 마음껏 쉬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럽다. 가족 각자의 취향에 맞춰 휴식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자극으로 둘러싸인 거실이 완성된다. 그러는 사이 가족 간의 대화는 미뤄지고, 감정의 교류는 줄어들고 있다. 아마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그 아빠는 평일 내내 회사 일로 지친 몸을 간신히 이끌고 가족과 함께 쇼핑몰을 찾았을 것이다. 충분한 노력이고 희생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가족이 회복해야 할 것은 ‘늘 행복한 모습’도, ‘완벽한 소통’도 아니다. 당연함에 기대어 헐거워져 버리지 않도록 관계를 조금만 더 단단히 잇기 위한 작은 노력, 그 한 걸음이 다시 시작되면 된다. 저녁 식탁에서 잠시 화면을 내려놓는 일, 대답 없는 말이라도 한 번 더 건네는 일,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 번 더 눈을 맞추는 일. 그 작은 반복이 단절되었던 가족을 다시금 연결해 줄 거라 믿는다.
글자를 물어보는 아이가 옆에 없었을 뿐, 그날의 난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화면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서 그 아빠와 다를 게 하나 없었다. 그 가족의 안타까운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고, 집으로 돌아온 난 스마트폰을 치워둔 채 아이들과 눈을 맞추려는 새삼스러운 용기를 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그 아빠와 아이가 화면이 사라진 공간에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깊은 잠에 빠졌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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