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환 교수 "KBS, 역사적 사실 재조명 뒷전"

  • 입력 2003년 12월 23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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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해방공간은 어떤 집단이 정파성에 얽매이게 되면 인간의 이성조차 얼마나 쉽게 내던지고 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한 시대였다. 그 공간에서 개인의지는 실종되고 단지 집단의지만이 광풍처럼 거리를 휩쓸었다. 우파에게 좌파란 소련 앞에 쩔쩔 매는 배소반족분자(拜蘇反族分子)일 뿐이었고 좌파에게 우파란 친일보수반동일 따름이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 일도양단의 이런 단순한 매도(name calling) 이상으로 설득력 있는 무기가 없었다.

당시의 언론은 그 시대의 그런 성격을 고스란히 떠안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우파신문은 우익의 대변지였고 좌파신문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였다. 언론은 정국 전체를 조망하며 종합적인 처방을 내놓기보다는 이전투구의 싸움판 한가운데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속간(續刊)을 추진했다. 두 신문은 1940년에 일본당국이 강제 폐간할 때 윤전기를 처분했기 때문에 신문을 찍을 인쇄소를 물색해야 했다. 서울 시내에 인쇄소는 몇 군데 있었지만 대량 인쇄를 할 만한 시설을 갖춘 곳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뿐이었다. 그러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직공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인쇄작업을 거부했다. 당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출판노조는 박헌영과 여운형이 이끄는 건준(建準)의 충직한 하부조직이었다. 그들은 좌파적 시각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친일보수반동의 기관지로 몰아붙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미군정의 강력한 종용을 통해 경성일보 매일신보측과 새로운 협약을 맺고서야 겨우 인쇄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신문이 속간호를 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해방공간에는 뜻밖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신탁통치 논쟁이 그것이다. 사실 탁치 문제는 국제정세에 조금만 덜 무지했던들 쉽게 알아차리고 좌우파가 공동의 대응책까지도 내세울 수 있는 사안이었다. 미국은 해방되기 오래전에 이미 탁치안을 국제사회에 어젠다로 던져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어느 미국 통신사를 뉴스소스로 하여 소련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만약 좌파신문들이 소련에 사실 여부를 캐고 들었다면 소련의 탁치 추진설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보도는 그 시대 최고의 특종이 되었다. 탁치를 추진하는 세력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을 좌파가 왜 밝혀내지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탁치가 실시되면 남한에서 우파의 활동공간은 크게 위축되고 좌파의 활동공간은 오히려 신장될 수 있다는 정파적 이해타산에 비추어 사실 여부를 캐는 것이 좌우파 모두에게 하찮은 일이었을까?

최근에 KBS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인쇄시설을 이용해 복간한 사실과 동아일보가 소련의 탁치 추진설을 보도한 사실을 다룬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인쇄시설을 이용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속간한 배경을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출판노조가 좌파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나의 설명은 프로그램에서 누락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또한 소련의 탁치 추진설을 보도한 동아일보를 음모론적 시각에서 재조명했지만 좌파가 그 보도에 대해 왜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재조명은 배제했다.

과거를 들추어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라면 역사는 들출수록 좋다. 그러나 어느 한 정파의 시각에서 다른 정파를 공격하려는 기도를 개입시키면 해방공간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즉 정파성이야말로 나라 전체를 망하게 하고 거기에 소속한 인간까지도 파괴한다는 교훈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초래할 따름이다.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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