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상법개정안 세계흐름 역행… 한국기업을 ATM으로 만들것”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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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vs 재계 쟁점조항 팽팽

“한국 경제가 발전하려면 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한 단계 성장해야 한다. 상법 개정은 그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박상기 법무부 장관, 한 언론과의 인터뷰)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주장은 팩트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 기업들은 헤지펀드가 흔들어대면 돈이 떨어지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신세인데 상법 개정안은 ATM의 열쇠를 아예 넘겨주는 꼴이다.”(재계 관계자)

법무부가 재계와 상법 개정안 합의안을 만들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다중대표소송제, 전자투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상법 개정안의 4개 쟁점 가운데 다중대표소송제 도입과 전자투표 의무화 도입에 우선 집중해 국회 통과를 노리자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재계는 “(개정안이)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거리가 멀다”며 “비즈니스의 근간이 되는 상법을 바꾸기엔 정부의 논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재계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에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상법 개정안에 따르면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주주가 ‘출자 기준 50% 초과’ 계열사 및 자회사의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주주가 기업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주주대표소송의 확대판이다. 재계는 이에 대해 “국내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들의 소송 공격에 휘말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 지주사들은 여러 개의 자회사, 손자회사 등을 산하에 두고 있는데 지주사 지분 1%(상장 지주사의 경우 0.01%)만 가지면 이 회사들에 모두 소송을 걸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셈”이라며 “독립적인 법인격을 가진 자회사에 대해 모회사 주주의 부당한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중대표소송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점도 사실과 다르다. 독일, 프랑스, 중국 등 대다수 국가는 다중대표소송제를 법으로 도입하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다중대표소송을 명문화한 일본도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100% 갖고 있는 경우에만 허용한다. 미국, 영국, 호주 등 영미법 국가도 판례로 자회사의 지분을 100% 갖고 있는 경우 허용하되, 호주는 무분별한 소송을 막기 위해 법원에서 제소 허가를 별도로 받도록 하고 있다.

재계는 현행 상법에서 이사회가 결의하면 지금도 가능한 주주총회 전자투표를 법률로 의무화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정안은 1만 명 이상의 주주를 가진 상장회사는 주총에 전자투표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하고 있다. 전자투표는 주주가 주총에 참석하지 않고도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지만 해킹이나 오류로 인한 주총 혼란, 주총에서 토론 절차가 생략되는 등 문제도 적지 않다.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도 대만, 인도, 터키에 불과하다는 게 재계의 설명이다. 그 외 나라는 전자투표도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맡겨뒀다. 미국 기업 대부분이 근거법으로 따르는 델라웨어주 상법에서도 전자투표를 인정하지만 강제 사항이 아니다.

한 대기업 법무팀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합한지를 두고 “정부가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은 국민소득 1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가의 상법”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법무부는 재계와 상법 개정안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해 3월부터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상장사협의회 등 재계 3단체와 수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합의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재계 관계자는 “재계와 합의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합의를 위한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
#상법개정안#법무부#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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