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캐나다에서 촉망받는 신예 디자이너가 무작정 짐을 싸 들고 1993년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일푼이 된 그는 20여 년간 모은 레코드판과 유명 디자이너의 소품 등을 헐값에 팔아야 했다. 오랜 친구를 잃은 것처럼 절망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46·사진) 씨의 이야기다. 손가방 모양 디자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세이 미야케의 향수 케이스, 아우디자동차, 메이블린의 화장품 용기, 현대카드 등이 그의 작품. 지난달 한화그룹이 발표한 새 기업이미지통합(CI)도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라시드 씨의 삶과 디자인 철학을 e메일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 한화의 새 CI는 창조적 파괴의 산물
“한화그룹이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말에 쉽게 마음이 움직이더군요.”
한화그룹이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미래적 실용주의’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분야를 디자인하고 있는 저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화의 CI는 세 개의 오렌지색 원으로 구성돼 있다. 제조, 서비스, 건설의 3개 사업군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지속성, 소비자 친화, 미래를 상징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 변화 없이는 새로운 창조도 없다
그는 4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년 중 절반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니는데 비행기 안에서도 작업을 즐긴다.
“보통 유럽행 비행기를 타면 100페이지 정도 스케치를 합니다. 제가 하는 프로젝트 중 30%는 주문받지 않은 것이에요. 디자인 작업 그 자체를 즐기는 데다 감이 오면 즉시 연필을 드는 게 습관처럼 돼 있죠.”
한국 기업들의 제품 디자인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도 여럿 만나봤다고 한다.
“한국 디자이너들은 머리가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은 다소 부족해 보였어요. 한국 기업들도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변화는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대중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려면 더욱 과감하고 혁신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좀 더 많은 사람이 훌륭한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충족시키는 ‘디자이노크라시(Designocracy·디자인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시대입니다. 이른바 시대정신을 담아 내는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제 역할은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니까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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