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티펠 권선주 사장 “집안 화목하면 회사일도 잘하죠”

  • 입력 2004년 8월 22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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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에서 경영자로 변신한 권선주 한국스티펠 사장이 자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40여개 피부질환 치료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권 사장은 주부사원들이 육아 문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권주훈기자
주부에서 경영자로 변신한 권선주 한국스티펠 사장이 자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40여개 피부질환 치료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권 사장은 주부사원들이 육아 문제에서 벗어나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권주훈기자
‘주부 직장인’의 가장 큰 고민은 육아 문제다.

일을 계속하자니 자녀가 걸리고 직장을 일단 그만두자니 재취업을 자신할 수 없어 속만 끓이게 된다. 이 때문에 아예 출산을 미루는 여성도 적지 않다. 한국스티펠 권선주(權善珠·58) 사장도 그랬다.

▽버리고 또 버리고=서울대 약대와 대학원을 나와 전문대 영양학과 전임강사로 일하던 권 사장은 1978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된 남편 차창용 서울대 의대 교수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겨우 10개월이 된 아들 승환이는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고 권 사장은 회상한다.

그는 경력을 인정받아 미국에서 국립암센터 방문연구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3년간 암 치료 관련 논문을 2편이나 발표했다. 80년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강단에 다시 서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권 사장은 하늘이 노래졌다. 네살된 아들은 권 사장을 ‘아줌마’라고 불렀다. 밤마다 자기 집(시댁)으로 가야 한다며 울었다.

권 사장은 결국 꿈을 접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게 무엇보다 급했다. 한 번은 아들을 버렸고 또 한 번은 꿈을 버린 셈이다.

전업주부가 된 뒤 6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했다. 어느새 아들은 초등학생이 됐다. 아들이 등교하고 난 후 지루한 ‘일상’과의 싸움이 점점 힘겨워졌다. 일에 대한 미련이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갔다.

▽여성 CEO로 산다는 건=86년 미국의 세계적인 피부질환 전문 치료제 제약회사인 스티펠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지사장을 공모했다. 권 사장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가족의 동의를 얻었다.

인터뷰 자리에서 스티펠 본사 임원은 권 사장이 자신을 ‘전업주부’로 소개하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꼭꼭 눌러 온 열정을 불태워 보고 싶다. 비즈니스는 잘 모르지만 알려주면 잘 할 자신이 있다. 가정경영 경험도 만만치 않다.” 권 사장의 배짱을 높이 산 스티펠 본사는 파격적으로 그를 한국지사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여성 경영인으로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병원을 찾아가면 ‘술집마담’으로 오해받기 일쑤였다. 이른바 ‘접대’를 할 수 없어 결정적인 순간에 계약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다.

회사경영도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주말마다 각종 해외 경제전문 주간지를 쌓아놓고 공부했다.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들과 남편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86년 5평짜리 사무실로 출발한 한국스티펠은 이제 무차입 경영 속에 연 매출 146억원을 올리는 큰 회사로 성장했다. 직원 40명의 1인당 생산성도 3억원 이상으로 업계 평균을 3배 이상 웃돌고 있다. 햇볕으로 인한 피부노화를 치료하는 ‘스티바-A’와 아토피 및 피부건조증 치료제인 ‘락티케어HC’ 등 대표 제품들은 이제 가정용 상비약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집안이 화목해야 일도 잘 된다=권 사장의 경영 철학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해당 업계에서는 상당히 이른 편인 94년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오후 5시30분이 되면 직원들에게 무조건 퇴근을 ‘강요’한다.

전 직원이 오전 7시30분 사내(社內) ‘카페테리아’에 모여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것도 이 회사의 독특한 전통이다. 아침에 잠자는 아내를 깨우지 말라는 권 사장의 방침 때문이다.

최근에는 출산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던 여직원을 5년 만에 복귀시키기도 했다. 전업주부의 애환을 누구보다 권 사장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권 사장의 꿈은 놀이방 보모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 회사 안에 놀이방을 설치해 여직원들의 육아 고민을 말끔히 해결하겠다는 각오다.

그는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업주부로 일단 돌아가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하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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