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빅딜 1년]시장안정에 기여…통합효과는?

  • 입력 2000년 6월 19일 19시 40분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통합한 반도체 ‘빅딜’이 이루어진 지 1년이 됐다. 현대가 LG반도체의 경영권을 인수한 것은 작년 7월7일. 그러나 양사간 양수도 계약은 5월20일 체결됐기 때문에 이미 1년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 정책 중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반도체 빅딜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8년. 한국의 기둥 산업인 반도체 분야의 중복투자를 막고 산업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LG는 물론 정치권의 반발까지 무릅쓰며 성사시킨 반도체 빅딜은 과연 어떤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을까. LG반도체를 통합한 현대전자의 ‘빅딜 1년’을 점검한다.》

현대전자 반도체부문 박상호(朴相浩)사장은 “운이 좋았다”고 운을 뗐다.

통합 논의가 시작된 98년 중반까지 바닥을 헤매던 세계 D램시장 가격이 지난해 7월 대만 정전과 잇따라 터진 지진 등의 여파로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해 현재 개당 8달러 중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 이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현대전자는 올해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빅딜의 타당성과 효용성을 따지기에 앞서 세계시장이 반도체 빅딜을 ‘도와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최대 성과는 시장 영향력 강화〓반도체 빅딜 논의가 시작된 이유는 공급에 따라 가격 변동폭이 큰 반도체 시장에서 국내업체끼리 ‘제살 깎기’ 경쟁을 벌여왔기 때문. 95년 410억달러에 달했던 D램시장은 98년 140억달러까지 축소되는 극심한 불황에 빠져 당시 국내 업체들의 ‘덤핑 경쟁’은 극에 달했다.

현대와 LG 양사를 합해 15조원 규모(98년 기준)의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 저가 경쟁을 벌이고 여기에 수조원대의 설비투자를 단행할 경우 그룹 전체의 재무구조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빅딜 논의로 이어졌다.

통합 전인 98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D램시장 점유율은 각각 11.9%와 9.2%였지만 통합후 지난해말 현대전자의 D램부문 시장점유율은 23.3%(현대전자 주장)로 높아졌다. 통합의 시너지 효과로 거래선과의 협상에서 ‘몸집’을 바탕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점과 ‘출혈 경쟁’이 없어진 것은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현대전자는 높은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가격을 인위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현대-LG의 반도체 통합이 또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기업간 인수합병(M&A)을 촉진시키는 등 패러다임을 바꿔 시장을 안정시켰다는 점도 시너지 효과로 꼽힌다. 96년 시장점유율 6.7%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5.8%의 마이크론이 합병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LG의 통합, 히타치와 NEC의 합병 등 전세계 반도체 시장은 현대전자와 삼성전자 마이크론 NEC의 4대 메이저가 75%의 시장을 점유하는 ‘안정적인’ 구조로 바뀌었다.

현대전자는 이밖에 지난해 매출의 93%를 차지한 D램 제품군에 대한 의존도를 개선해 올해 D램 매출 비중을 82%로 낮췄고 S램과 플래시 메모리 등 비메모리에 대한 비중을 각각 9%로 증가시키는 등 사업포트폴리오를 개선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1년 이상의 장기전략 고객, 즉 대기업 구매자의 비중은 통합전 50% 수준에서 올해 85% 이상으로 높여 안정적인 사업구조와 매출기반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경영 효율과 기술적 측면의 시너지는 미지수〓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외형적인 실적은 많이 좋아졌지만 경영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시너지 효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대전자의 전체 인원은 통합 직후 1만7400명에서 1만5400명으로 11% 줄었다. 연구인력은 똑같이 3400명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LG반도체에 있던 핵심 연구인력의 상당수가 통합 후 벤처업계나 동종 업계로 빠져나갔다.

이는 최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차세대 고속D램인 램버스D램 분야를 보면 잘 나타난다. 통합 전 LG반도체는 64메가램버스D램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통합과정에서 기술인력들이 빠져나가면서 삼성전자에 이 분야 1위를 빼앗겼다.

현대와 LG는 기업문화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직원들의 분위기를 어떻게 추슬러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현대전자는 지난해 IBM 출신의 전문경영인 박상호 사장을 영입하고 ‘BTTB(Better Than The Best)’라는 슬로건으로 이원화된 조직을 통합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이천과 청주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이 달라 별개의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는 등 ‘화학적 통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

▽하반기 넘기면 재무구조 낙관적〓통합 이전 양사의 부채는 현대전자 11조원, LG전자 7조원 등으로 부채비율은 각각 935%와 617%에 달했다. 현대전자는 그동안 재무구조 개선 노력으로 3월말 현재 차입금 비율을 116% 수준으로 낮췄으며 사업운영을 ‘캐시 플로’위주로 전환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제는 D램 가격. D램이 현재의 가격 수준만 유지한다면 현대전자는 원가대비 개당 3달러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고 건실한 재무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한진증권 최석포 연구위원은 “D램 가격이 앞으로 6개월 이상만 현 수준을 유지한다면 현대전자는 물론 현대그룹 전체의 유동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며 “문제는 현대전자 스스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내부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인터뷰]현대전자 박상호 반도체부문 사장▼

현대전자 반도체 부문 박상호(朴相浩·53)사장은 휴렛팩커드와 IBM의 부사장을 역임하고 지난해 7월 부임한 전문경영인.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다는 그는 현대와 LG의 순조로운 통합작업을 증명하려는 듯 인터뷰에 LG 출신의 책임연구원과 현대 출신의 메모리 영업 부장 등 두 명을 대동했다.

박사장은 “문화가 다른 두 집단에 새로운 문화를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전직원이 뛰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빅딜 1년에 대한 평가는….

“통합은 정부 주도의 빅딜 형식이었지만 시장의 트렌드 변화에 맞춰 적절한 시기에 통합했다고 본다. 어려운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D램 가격이 계속 오르는 등 시장이 좋아지면서 시장이 통합을 봐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현재 이익을 남기면서 감가상각비 내에서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여건이 좋다.”

―지난 1년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직원들이 나간다고 할 때 가장 힘들었다. 많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다른 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핵심 멤버는 사전 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청주와 이천 공장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데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문제는 없는가.

“반도체 공정을 이해하면 간단하다. 64메가D램 하나를 만드는 데 180개 공정을 거친다. 복잡한 생산과정을 무조건 하나로 통합한다고 해서 시너지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구소라든지 영업 등 생산 외적인 부분에서는 통합을 통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현대전자는 현대투신에 상당한 지분을 투자했다. 유동성에 문제는 없는가.

“현대전자는 현대투신을 비롯해 다른 현대그룹 계열사 지분을 모두 정리하겠다고 선언했고 현재 그런 작업이 진행 중이다. 반도체는 현금 장사인데다 현재 경기가 좋기 때문에 현금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램버스D램 등 기술력이 요구되는 부분에서 시너지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는데….

“빅딜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처진 것이 사실이다. 현재 초기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램버스D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언제든 본격 착수할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다.”

―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높은데….

“인력이 많이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빅딜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벤처 열풍으로 다른 기업에서도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 연구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반도체 호황 언제까지…▼

반도체 호황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빅딜의 혼란 속에서 자칫하면 경쟁력을 상실할 수도 있었던 현대전자가 위기를 순조롭게 극복한 것은 세계 반도체시장의 호황에 힘입은 바 크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호황이 계속된다면 현대와 LG의 ‘반도체 빅딜’은 한국 산업 전반에 상당한 플러스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최근 반도체 현물가격의 급상승은 △전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에 따른 측면 △인터넷 비즈니스의 호황과 PC시장의 급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반도체 공급 부족은 96년부터 시작된 D램의 불황으로 업체들이 시설 투자와 신규라인 증설을 기피하면서 발생한 현상. 최근 모든 D램 업체들이 기존의 회로선폭(0.20∼0.23μ)을 0.17∼0.18μ으로 시링크(회로선폭 미세화)함으로써 단위 생산량을 늘리고 있지만 폭주하는 수요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D램에서도 64메가D램, 128메가D램 등으로 수요가 다양해지고 플래시 메모리, S램 등 D램 이외의 반도체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업체들이 D램을 집중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점도 공급 부족 현상을 부채질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수요 측면에서는 전 세계적인 인터넷 비즈니스 열풍과 저가PC의 출시로 PC 수요가 크게 늘어난 점이 반도체 가격 상승의 이유로 분석된다. 메모리 수요 증가로 올 하반기부터 D램은 5% 이상의 공급 부족이 예상되며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하반기에는 아무리 대형 거래선이라도 원하는 물량을 제때 공급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현재의 반도체 공급부족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값은 이달에 9달러선을 돌파하고 9~10달러선에서 안정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도 2002년까지는 호황세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올해 사상 최대 매출과 순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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