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망한 기업들은 거액의 단기자금을 빌려다 시설투자에 썼으니 성할 리가 있느냐』 금융기관들은 요즘 대기업부도 등 경제위기의 책임을 기업들의 무분별한 확장과 차입경영에만 돌리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금융기관도 부도사태의 책임 당사자들이다. 망할 기업인지, 흥할 기업인지도 모르고 듬뿍 듬뿍 빌려주기만 했지 기업의 무모한 확장과 투자행태에 제동을 걸지는 않았기 때문.
16일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게 된 태일정밀의 경우를 보자. 작년 한해동안 대구종금 태일개발 뉴맥스파이낸스 ㈜청주방송 신코 테크메디아 동호 동호전기 뉴맥스인터내셔널 등 무려 9개회사를 인수했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주요 거래은행들은 당연히 이 회사의 무분별한 기업인수 행각을 말렸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는 『그 회사가 현정권 고위층과 선이 닿아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은행들이 지급보증서 한장으로 대출을 해줬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금융기관의 심사 능력과 자세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한편 한 시중은행 행장은 『금융기관 본지점이 우후죽순처럼 너무 늘었고 이들이 룰을 중시하지 않은 채 과당경쟁을 벌여온 것이 오늘날 금융산업 위기의 한 배경』이라고 자체 진단했다.
올해 좌초한 재벌급 기업이 은행과 종합금융사 등에서 끌어간 순여신은 20조5천억원을 웃돈다. 그중 3분의 2인 13조6천여억원을 빌려준 은행권은 「울고싶어라」다. 올 연말 결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한국은행 관계자조차 『은행들이 엄청난 액수를 대손충당금으로 쌓아야 하므로 12월에는 자금부족이 심각해지고 「금융대란」이 온다는 소문까지 나돈다』고 실토할 정도다.
종금사는 사상 처음 16개사가 연8%로 1조원의 특별융자를 받았다. 그러나 향영21세기리스크컨설팅의 이정조(李定祚)사장은 『종금사의 어려움은 손익이 아니라 자금여력 문제』라며 『금리가 훨씬 높더라도 자금을 더 많이 내줘야 옳다』고 주장했다.
종금사들이 은행에서 지급요구 받는 기업어음(CP)을 결제할 여력이 생기면 기업들에 대한 무분별한 자금회수를 덜 할 것이고 그만큼 억울하게 무너지는 기업도 줄어든다는 것.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관계자들은 『현재 금융시장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신용위축 때문에 어려움에 빠졌다』고 보고 있다.
금융기관마다 「우리만 먼저 자금회수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거래기업이 부도위기에 몰릴 때 최악의 결과만 빚어진다는 것.
이한구(李漢久)대우경제연구소장도 『금융기관들이 서로 믿는 것만이 모두 함께 사는 길이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정조사장은 『장기적으로 금융기관은 사정이 바뀌면 무작정 얼굴을 바꾸는 야누스가 아니라 기업들의 경영잘못을 지적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는 컨설팅 기관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상당수 기업이 자구노력 기회만 주면 살아날 수 있는데도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며 기업과 금융기관의 손실을 최소화할 길을 채권자 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정상화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한 대출금을 출자금으로 전환하거나 화의도 금융기관이 먼저 주선해볼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나아가 살릴 수 있는 기업에는 △원금은 우선 상환을 유예하면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고 △금리도 초우량기업 수준으로 낮추는 파격적인 공생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경경제연구소 박우규(朴佑奎)이사도 『부실 대기업이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금융권 부실로 변하는 것이 근원적인 문제』라면서 『기아와 한보 등의 제삼자 인수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안들이 누적돼 있는데도 재경원 관계자들은 『대기업 부도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망하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원칙론만 펴고 있다.
〈윤희상·이용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