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변혁을 원하는가… 반 발만 앞서가라

  • 동아일보

1900년대 골드코스트 지역 일간지
사회문제 비판하는 익명 기고 게재… 이후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 탄생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은밀하게 확산된 혁명 역사 조명
◇혁명을 준비하는 시간/갈 베커만 지음·손성화 옮김/496쪽·2만5000원·어크로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걸음만 앞서가라”고 했던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꽃피우기도 전에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미국 잡지 ‘애틀랜틱’ 수석 에디터가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례들을 훑으며, 이 ‘반걸음 앞서기’의 미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책이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아이디어일수록 단숨에 폭발시키기보다 조용하고 끈질긴 확산 과정을 통해 살아남는다는 게 골자다.

1900년대 초 영국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신흥 계층이 등장하며 지역 신문들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그때껏 가지지 못하던 것이었다.

1900년대 초 영국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서 지역신문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 신문들은 식민지인들의 자의식을 깨우며 훗날 독립의 주춧돌이 됐다. 사진은 1936년 4월 27일 발행된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 신문의 1면. 사진 출처 페이스북 캡처
1900년대 초 영국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서 지역신문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 신문들은 식민지인들의 자의식을 깨우며 훗날 독립의 주춧돌이 됐다. 사진은 1936년 4월 27일 발행된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 신문의 1면. 사진 출처 페이스북 캡처
그중 은남디 아지키웨가 창간한 일간지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는 거의 전적으로 독자 기고문으로 채워졌다. 어느 정도는 궁여지책이었다. 자체 취재 기사로 지면을 메울 만한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주요 뉴스 외에는 교육받은 영어 사용자인 소규모 독자 공동체가 보내온 편지와 의견, 자유기고 기사들이 신문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핵심적인 코너의 이름은 ‘투덜이 구역’이었다. 이름 그대로 토론하고 불평하라고 만든 공간이다. 의견 개진은 거의 익명이나 가명으로 이뤄졌다. 영국 기업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아프리카 농민들에게서 사들이던 코코아 가격을 낮추자 이를 비판하는 글들이 익명으로 실렸고, 일부다처제 같은 사회 문제 역시 치열한 토론의 대상이 됐다.

아지키웨는 결국 선동적 내용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기소된다. 당시 그는 ‘지크’란 필명으로 활동했는데, 변호인은 지크와 아지키웨가 동일인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논리로 무죄를 끌어냈다. 이 신문에 실린 글은 대부분 익명이어서 필자들은 마치 나무 뒤에 숨어 돌을 던지고 달아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움직였다. 바로 그 익명성과 느슨한 연결망이 아지키웨를 법의 심판으로부터도 지켜낸 셈이었다.

20년 뒤 골드코스트는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이자 범아프리카주의의 거점 국가가 된다. 국명은 가나였다. 훗날 가나의 초대 총리이자 대통령이 된 콰메 은크루마는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가 “불이 붙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연기였다”고 회고했다.

시민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놓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피어난 변화의 불꽃이었다. 만약 아지키웨가 반걸음이 아니라 몇 걸음이나 앞서 나갔다면 어땠을까. 불이 붙기도 전에 주동자로 처형되거나 신문이 강제 폐간되지 않았을까.

책에는 이처럼 느리고 끈질긴 연결의 사례들이 이어진다. 1635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천문학자 니콜라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는 로마와 이집트, 레바논, 네덜란드 등에 흩어져 있던 과학자들에게 20년 동안 편지를 보내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여러 지역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월식을 관측하는 것. 그는 이를 통해 당시 널리 통용되던 경도 계산이 얼마나 부정확했는지를 밝혀냈다.

당시는 사상 통제가 극심한 시대였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란 생각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벌거벗겨진 채 화형당했다. 반면 페이레스크는 종교재판에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유럽 전역에 과학적 방법론이 서서히 스며들게 했다. 혁명은 때로 함성보다 우회로를 통해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시성이 지배하는 소셜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책에 담긴 느리고 끈질긴 연결의 사례들이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진정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교훈까지 함께 남긴다.

#아프리칸 모닝 포스트#반걸음 앞서기#혁명적 아이디어#은남디 아지키웨#익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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