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일상이 무너지자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 동아일보

◇상실/나탈리아 쇼스타크 지음·정보라 옮김/376쪽·1만8000원·스프링


사춘기 소녀 마리안나와 남동생 야쿱 남매를 키우는 한나는 정신없이 집안일을 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간신히 다잡는다. 얼마 전 집으로 청천벽력 같은 채권 추심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 도매상으로 일하는 남편 그제고시가 큰 빚을 졌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동업자가 재고를 챙겨 사라졌다. 폴란드에 살던 부부는 남매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서두르느라 숨을 헐떡거리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약함을 드러내는, 즉 경우에 맞지 않는 옷, 지워진 매니큐어, 구두와 색깔이 똑같은 가방, 피부색에 맞지 않는 립스틱 같은 것이다. 그녀는 약함을 허용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 알리치아에 대한 묘사다. 알리치아는 젊은 시절 남편이 집을 나가면서 홀로 그제고시를 키웠다. 독립적인 여성이지만 갑자기 손주들이 일상에 들어오면서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핵심은 마리안나다. 마리안나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남동생에게 부모의 관심이 집중되고, 자신은 양보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이젠 할머니와 살게 되면서 사랑하는 반려견 프라이다와도 이별해야 한다.

모녀와 고부, 할머니와 손녀 사이의 관계와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다소 예측 가능한 전개는 아쉬운 대목. 하지만 인명과 지명 등만 한국식으로 바꾸면 한국 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와 유사한 감성을 바탕에 뒀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폴란드 일간지 기자 출신의 칼럼니스트다. 번역자인 정보라 작가는 2022년 ‘저주 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 대담을 하게 되면서 저자와 인연을 맺었다. 정 작가는 러시아와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정 작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삶이란, 특히 가족의 삶이란 작고 일상적인 모든 순간들의 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실’은 그렇게 쌓인 순간들이 무너지고 그 이면에 숨어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라며 “그 진실이 드러난 뒤에도 삶은 이어진다. 가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관계#폴란드#상실#문학#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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