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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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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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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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일반3%
음악3%
  • [횡설수설/조종엽]“트럼프는 미국의 히틀러” 비판하다 러닝메이트 된 밴스

    “J D가 나에게 알랑방귀를 뀌고(kiss my ass) 있다. 그는 내 지지를 간절하게 원한다.” 2022년 9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J D 밴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오하이오) 지지 유세에서 한 말이다. 사실 밴스는 이민 정책을 두고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에 빗대는 등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런 밴스가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걸 군중 앞에서 과시한 것이다. 올 11월 치러질 대선에서 승기를 잡은 트럼프가 15일(현지 시간)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밴스는 쇠락한 러스트 벨트 출신으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2016년 출간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책엔 삶이 무너진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그가 예일대 로스쿨에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지원서를 쓸 때 ‘흑인이나 진보주의자인 척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자포자기 수준이 그렇게나 심했다는 얘기다. 책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정서를 대변했지만 밴스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다. 2016년 대선 당시엔 트럼프를 “유해하다(noxious)”고까지 했고, 보수 성향의 무소속 에번 맥멀린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 그의 입장은 정치 입문을 고려하기 시작한 2018년경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오하이오주 등 지역민의 좌절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후 자신의 트럼프 비판 트윗을 삭제했고,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에 뛰어들었다.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라는 주장에도 동조하는 등 골수 트럼프 지지자로 거듭났다. ▷밴스의 변신이 순전히 정치적 야망 때문인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다만 요즘 미국 정치 현실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트럼프에 맞서고서 정치적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2년 오하이오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 역시 트럼프가 누구를 간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밴스가 원래 가진 고립주의와 경제적 포퓰리즘 지향이 트럼피즘에서 길을 찾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984년 8월 2일생으로 만으로는 아직 39세인 밴스는 1952년 리처드 닉슨(당시 39세) 이후 최연소 미국 부통령 후보다. 트럼프의 적지 않은 나이와 도덕성의 결함을 커버할 수 있는 후보로 꼽힌다. 당선될 경우 2028년 선거엔 출마하지 못하는 ‘트럼프 이후’를 노려볼 수도 있다. 밴스가 처음 유명해졌을 때 미국의 진보 성향 주간지 ‘뉴 리퍼블릭’은 그를 두고 ‘블루 아메리카(백인 노동자 계층)를 위한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 진짜 선지자가 될지, 트럼프뿐 아니라 밴스에게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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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집중호우에 내려진 ‘16자’ 대통령 지시사항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방미 일정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 정부기관에 내린 장마 대비 ‘16자 지시사항’이 논란이다. 지시 내용이 “이번 장마에도 피해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천 범람과 제방 붕괴 위험을 점검하라든가, 산사태 취약지역은 미리 대피하도록 유도하라든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 지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각 정부 부처에 전파했고 산하 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시도교육청, 일선 학교들에까지 통보됐다. ▷전달받은 공무원과 교사 등은 “이렇게 짧은 대통령 지시사항은 처음 본다” “(세부) 내용이 전무하다 보니 너무 건성건성으로 보인다”는 반응이다. 메시지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고, 분량도 일종의 형식이다. 공무원들이 호우 대비의 각론을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대통령의 메시지에 담느냐 아니냐는 무게감이 천지 차이다. ▷최근 한반도는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는 ‘극한 호우’가 일상화됐다. 수십 년에서 100년에 한 번 내릴 만한 큰비가 몇 년 만에 찾아오고 있다. 2022년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반지하 주택 침수 참사가 났고, 지난해엔 오송 참사가 발생했다. 과거 강수량 기준으로 만든 대책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제방의 계획홍수위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산사태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장마에도”로 시작해 마치 연례행사 같은 느낌을 주는 대통령의 ‘16자 지시’에선 그런 긴장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시가 나오고 하루가 지난 9일 밤부터 10일 오전까지 충청과 호남엔 ‘물 폭탄’이 쏟아졌다. 남북 폭은 좁고 동서로 긴 강수 구역이 형성되면서 일부 지역엔 200년 만에 한 번 올 만한 폭우가 내렸다. 전북 군산 어청도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시간당 146mm의 비가 내렸고, 충남에도 시간당 100mm가 넘게 왔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다. 충남 서천에서 산사태로 집이 무너져 70대 남성이 사망했다. 충북 영동에선 저수지 둑이 무너져 주민 1명이 실종됐다. 곳곳에서 주민이 고립되고 집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침수됐다. ▷대통령은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기후변화의 영향 등으로 예측을 넘어서는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한다”며 피해 대비를 당부했다는데, 왜 실제 지시는 달랑 한 줄로만 내려갔을까. 그 많은 보좌진 가운데 ‘16자 지시’에 살을 붙일 사람이 없나. 이태원 참사 뒤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은 참모 조직이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컨트롤타워”라고 했는데, 참모 기능은 제대로 하는 건지 싶다. 대통령실을 지붕을 대강 얼기설기 엮어 비 새는 집처럼 꾸려가는 것은 아닌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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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봄, 여~름, 갈, 겨울

    최근 서울의 한 도심 농원에서 대표적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도 근래 들어 바나나 온실 재배가 충남북과 경북 선까지 확대되긴 했다. 그러나 서울의 노지에서 열매가 열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례적인 결실엔 지난해에 이은 기록적 더위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난해 전국 연평균 기온은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은 13.7도에 이르렀다. 지난달 서울은 평균 최고기온이 30.1도로 근대적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여름은 계속 길어지는 추세다. 기상학적 정의로 요즘은 일 년 중 넉 달이 여름(일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오른 기간)이다. 1912∼1940년엔 여름이 평균 98일(6월 11일∼9월 16일)이었는데, 2011∼2020년엔 29일이 늘어 127일(5월 24일∼9월 28일)이 됐다. 가을은 짧아져 온 듯하면 간다. 그래서 여름은 길게 발음해 ‘여∼름’, 가을은 짧게 ‘갈’이라는 농담도 나온다. 기상청이 이런 실정을 반영해 통념상 3개월씩으로 나뉜 계절의 길이를 재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제 중반으로 접어드는 장마는 예측이 어렵다. 게릴라성으로 열대성 스콜 비슷하게 집중호우가 내린다. 낮엔 갰다가 밤에 ‘야행성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장마 기간은 길어지는 추세다. 원래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가 전통적 장마철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선 8월에 강우량 곡선이 재차 산 모양을 그리며 9월 하순까지 2차 강수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더워진 대기가 수증기를 더 많이 머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젠 장마가 아니라 ‘우기(雨期)’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남해안까지로 한정됐던 아열대 기후가 점차 북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지난달엔 아열대 곤충인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극성을 부렸고, 뇌염모기의 출현도 빨라지고 있다. 한라봉이 아닌 ‘경주봉’이 나온 건 벌써 옛말이 됐다. 망고와 파파야 등도 경북 등지에서 재배된다. 바다도 뜨거워져 제주도 앞바다엔 열대의 맹독성 바다뱀이 출현했다. 24절기 중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小暑)는 7월 6, 7일이지만 이젠 씨 뿌릴 때라는 망종(芒種·6월 5, 6일)이나 하지(6월 21, 22일) 즈음이 어울리는 것 같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난해는 기록상 지구가 가장 더웠던 해였다. 하지만 5년 안에 새 기록이 쓰일 가능성이 86%라고 한다. 폭염 발생은 산업화 전보다 세 배 가까이로 증가했고, 발생 시 강도도 강해졌다. 온실가스 배출이 줄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앞으론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바나나야 흥밋거리라지만 그런 기후에 사람이 적응할 수 있을까가 문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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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오송참사 겪고도 침수 대비 손 놓은 지하차도 87%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1억2000만 원을 쓸 수 없다는 인식이 안타깝다.” 청주지법 재판부가 지난달 31일 ‘오송 참사’를 일으킨 공사 현장소장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이 돈이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 미호천교 도로 확장 공사장에 홍수 방호벽을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설사는 콘크리트 방호벽 대신 흙으로 임시 둑을 쌓았다. 제대로 다지지도 않았고, 높이도 모자랐다. 부실 공사였다. 이 둑이 무너지면서 인근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서 14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판사는 “최소 징역 15년은 선고해야 했는데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다음 주면 전국이 대부분 장마권에 든다. 요즘엔 집중 극한 호우 탓에 하천 범람 위험이 더욱 커졌다. 그제 감사원이 지하 공간 침수 대비 실태를 점검한 보고서를 냈는데, 전국 지하차도 1086곳 중 제방 붕괴 시 침수 우려가 있는 곳이 최소 182곳이나 됐다. 그 가운데 159곳(87%)은 차량 진입 통제 기준에 인근 하천 홍수주의보 같은 외부 위험요인이 빠져 있는 등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였다. 132곳(73%)은 차량 진입 차단시설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오송 참사’를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행정안전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한 지하차도 40곳 중 17곳은 지원을 받지 못해 차량 진입 차단시설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한다. 환경부의 홍수 관리 대책은 시작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 용역 계약을 맺었던 업체가 전체 하천의 6.3%인 235개 하천을 분석 대상에서 누락한 것이다. ▷사실 오송 참사 역시 그로부터 3년 전 부산 침수 사고와 양상이 판박이였다. 집중호우가 쏟아진 2020년 7월 부산 동구 초량제1지하차도에서 침수 사고가 났다. 차량 6대가 잠겨 3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당시 지하차도 출입 통제 시스템은 3년째 고장 나 있었고, 배수펌프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행안부는 부랴부랴 자동차단 시설 구축과 원격 차단, 상황 전파 시스템 구축 등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3년 뒤 오송의 궁평2지하차도에도 침수 시 차량 진입을 자동 차단하는 시설은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설치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배수펌프가 먹통이었던 것도 그대로다. 막상 물이 지하로 밀려들자 작동을 멈췄다. ▷지하 침수 사고가 반복됐던 7월이 코앞이다. 감사원 지적에 대해 행안부와 국토교통부는 대책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현장에서 실제 얼마나 이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비가 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운전자들이 지하차도에 진입해도 될지 말지 불안해하는 게 우리 재난 안전 수준이다. 같은 비극을 얼마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참사 예방에 전력을 다하려 하는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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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비공개 전환 이유 뭘까

    1987년 12월 8일 최창락 동력자원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륙붕 6-1광구에서 국내 최초로 양질의 대규모 가스층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부산 동쪽 120km 해상 ‘돌고래3’ 시추공에서 생산 가능성을 시험한 결과 10시간 동안 가스가 분출돼 불길이 타올랐다는 것. 국내 대륙붕 시추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 아니면 민주 정부냐’, 운명을 가를 대통령 선거일을 1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산유국의 꿈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며 흥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매장 추정량을 묻는 물음에 기술진은 답을 꺼렸다. 정부는 “내년부터 3개의 평가정을 뚫어 경제성 여부를 판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실 1972년 첫 시추 이래 국내 대륙붕에서 미량의 천연가스나 유층(油層)이 발견된 건 여러 차례 있었다. 경제성이 없었을 뿐이다. 일부 언론 매체들은 발표 시점이 미묘하다는 점을 짚으며 섣부른 기대나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듬해 매장량 평가 시추에서 결국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이 호들갑을 떤 셈이 됐다. ▷한국석유공사가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에서 석유·가스를 탐사하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원래는 정보공개포털에 자료 상당수를 ‘부분공개’ 상태로 올려놨는데, 최근 탐사 시추 관련 자료 등을 비공개로 바꾼 것이다. 공사는 “개인정보가 포함된 문서 등을 전환했다”고 했다. ‘등’자가 붙었으니, 개인정보 외 다른 이유로 비공개한 자료도 있다는 얘기다. 공사는 야당의 자료 요구도 ‘국가 자원안보 중요 정보’라며 거부하고 있다. ‘대왕고래’가 몸을 숨긴 것이다. ▷자원 부국의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7년 돌고래3 발표 당시엔 생산 가능성 시험 결과라도 있었다. 이번엔 탐사 시추도 안 한 채 갖고 있던 자료만 새로 분석했다고 한다. 분석한 기업 액트지오의 대표가 브리핑까지 했지만 여러 의문이 깔끔하게 풀리진 않았다. 국민은 ‘대왕고래’가 얼마나 유망하길래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깜짝 발표’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자원 개발은 특성상 언론이나 국민이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선 이번 유전 탐사 결과 발표에 대해 10명 중 6명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직 첫 삽도 안 떴는데 정부가 믿음을 잃은 것이다. 이런 식이면 비단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뚝심 있는 탐사가 필요한 유전 개발이 초장부터 좌초할 우려가 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돌고래3의 재판이 되지 않으려면 국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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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괴롭힘 당했다” 거짓 신고… 법 악용하는 ‘오피스 빌런’

    자동차 부품 업체, 보건소, 전투기 제작 업체, 시·군청, 금융회사, 해경, 대기업…. 모두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직원이 나왔거나 그랬다는 의혹이 제기된 곳이다. 괴롭힘 피해는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자살로 끝난 산업재해의 절반 이상은 과로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비극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부당한 피해를 막는 법이 생기면 악용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적 이익을 노리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상사에게 복수하려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허위 신고를 하는 이들이다. 비자발적 퇴사로 인정받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상사가 괴롭혔다’고 거짓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정당한 업무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다가 징계를 받게 되자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하기도 한다. 인사 발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서장을 갈아 치우려고 거짓 신고하는 사례도 있다. 좋은 취지의 법이 ‘오피스 빌런’(직장 내 악당)의 무기가 된 셈이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등의 관련 실태 연구에 따르면 허위 신고자는 보상금이나 고용 계약 연장 등 보상을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상의 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분리나 가해 중단을 주로 원하는 것과 달랐다. 같은 행위에 대한 반복 신고도 많았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하며 피신고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거짓 신고를 당한 사람 5명 중 1명은 부당한 징계까지 받았다고 한다. 허위 신고가 또 다른 유형의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학계에선 모호한 법 규정이 허위 신고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 법은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에 비해 비슷한 법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조항에 지속성이나 반복성 규정을 두고 있다. 대체로 6개월∼1년 이상 또는 주 1회 이상 계속돼야 괴롭힘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우리 사정에 맞게 바꾼다고 해도 객관성이 보완될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허위 신고의 폐해는 신고당한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 신고가 횡행하면 진짜 피해자의 신고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지금도 직장 내 폭행·폭언 피해자 10명 중 6명이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는데, 신고가 더 위축될 수도 있다. 가짜 사건으로 근로감독관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면 피해 구제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부작용을 막기 위해선 회사가 취업규칙에 허위 신고인을 징계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마련하도록 한 해외 사례를 검토할 만하다.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면 진짜 약자가 피해를 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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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이 정한 경로에서 튕겨 나와도, 삶은 또 이어집니다”[데스크가 만난 사람]

    《분위기 따라 대학에 가고 떠밀리듯 취업엔 성공했지만,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진 못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일하며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다가 ‘번아웃’을 겪는다. 유명 애니메이션 밈(meme)처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시전하고 보란 듯이 그만두고 싶지만 그 다음이 막막해서 꾸역꾸역 다닌다. 우리 시대 많은 직장인의 초상일 것이다.》 황보름 작가(44)의 20대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흔한 비극을 흔치 않은 희망으로 바꿨다. 나이 서른에 7년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10년을 갈고닦은 끝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 그가 2022년 출간한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는 국내에서만 30만 부가 팔렸고, 지난달엔 서점 직원들이 투표로 뽑는 일본 서점대상 1위(번역 부문)를 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독자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는데 큰 위로를 받았다’, ‘책에 나온 문장을 삶의 지침으로 삼겠다’며 열렬한 독후감을 보내온다. 옛 동료들은 경력을 쌓아 가는데, 독자를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썼던 황 작가의 30대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을까 싶어 29일 만났는데, 그는 “대체로 많은 날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했다. ‘취업이 잘된다’는 전망에 사촌 오빠들을 따라 진학한 공대, ‘3점대 후반’ 학점으로 졸업(2004년), 취업 재수도 없이 입사한 대기업 LG전자. 황 작가의 사회생활 출발은 순탄한 편이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일하게 된 곳은 개발 부서였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깨달았다. 자신은 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개발자는 자는 거 아냐’라는 슬픈 농담이 있을 정도의 장시간 노동도 괴로웠다. 휴대전화 새 모델을 만드는 3∼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 7일 근무에 오후 10, 11시 퇴근이 당연시됐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면 사람이 피폐해지잖아요. 더구나 일이 없어도 야근을 해야 했어요.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느낌? 직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위에 보여주려던 것도 있던 것 같고….” 동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일에서 보람을 찾긴 어려웠다. 3년 차에 번아웃이 왔다. “너무 힘들었는데, 그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끔찍한 시절이라 그런가 봐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가 체중이 갑자기 15kg 늘기도 했어요. 어느 정도 지나니 완전히 무감해지더라고요. 집과 회사만 왕복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그냥 기계처럼 살았어요.” 회사를 그만둔 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코너에 몰려서, 무기력해서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동안 돈 쓸 시간도 없었고, 소비에 관심이 없었던 덕에 통장에는 7년간 받은 월급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좋아하는 일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마흔 살 전에는 그런 일을 찾자.’ 부모님 집에 함께 살면서 야금야금 조금씩 쓰면 10년은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어학원에 다니다가 2012년쯤부턴 1년쯤 강사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였다. 책 2권에 해당하는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출간 거절 메일만 돌아왔다. 가까스로 2017년 첫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어떤책)를 냈지만 1쇄도 다 안 나갔다. 이후 ‘난생처음 킥복싱’(티라미수 더북),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뜻밖) 등 에세이 2권을 더 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했다. 방에서 글을 쓰는 단순한 삶이었다. 믿을 구석도 없는데 느긋했다고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어요. 5월엔 ‘12월까지는 버틸 수 있잖아’ 생각했죠. 뚜렷한 계획도 희망도 없었지만 그냥 그 생활이 좋았어요.” 부모님은 황 작가를 마냥 지지해줬다. “서른 넘어서 작가 되겠다고 몇 년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엄마 아빠 몸에서 사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회사 다니며 불행해하는 걸 느끼셨대요.” 그런 그도 마흔한 살이 되자 ‘겉은 작가였지만 속은 백수였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먹고사는 일의 요원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2021년 초 선배의 소개로 다시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선물을 준다. 2018년 ‘시간은 남는데 에세이는 어렵고, 몇 달만이라도 소설로 도망가자’는 마음에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했던 것이 ‘휴남동 서점’이었다. 이미 전업 작가 생활엔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 뒤 이 소설을 별 기대 없이 전자책 출판 공모전에 출품했다. 당선된 소설은 ‘밀리의 서재’에서 e북으로 출판됐고,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다. 소설엔 번아웃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도 갈라선 뒤 서점을 차린 영주, 취업에 실패하고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무기력증에 빠진 고교생 민철,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겪고 그만둔 뒤 뜨개질을 하는 정서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인물 사이엔 갈등이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자가 “신춘문예라면 예심서 낙방했을 것 같다”고 하자 황 작가는 “등장인물끼리 지지고 볶는 얘기가 아니라, 애초에 관계를 통해서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도 ‘다음이 너무 궁금하다’는 분들이 너무 많다”라며 웃었다. 소설을 빛내는 건 삶의 벽에 부딪힌 이들이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깊어지는 고민과 함께 성장하고, ‘세상이 정해 놓은 경로를 따르지 않아도, 길에서 튕겨 나왔다고 해도 삶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슷한 상황을 ‘앞서 겪어 본’ 작가의 내공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내가 노력을 덜 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같은 좌절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 명 한 명이 추스르고 일어서는 걸 돕고 싶었어요.” 소설은 꽤 직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를 거론한다. 황 작가는 말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해 노동에 삶이 잠식되잖아요.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도 크고, 삶을 영위하고 미래를 준비할 만큼 돈을 버는 이들도 적고요. 문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돼요. ‘요즘 취업 안 된대, 비정규직 많지’라고 하면 식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 개인을 들여다보면 그런 게 하나하나 얼마나 큰 상처이겠어요. 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앞에서 문이 닫혔을 때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었습니다.”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저는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지나오지 못해서, 그냥 정통으로 맞아서 이런 소설을 쓴 것 같다”며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덜 힘들게 지나길 바란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 말고 주말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다른 정체성을 만들면 무게가 덜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서점가엔 ‘휴남동 서점’과 언뜻 닮아 보이는 소설이 꽤 이어지고 있다. 친숙하고 추억이 있을 만한 공간을 배경으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여러 인물이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다. ‘힐링 소설’, ‘장소 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기존엔 문학적 성취를 이룬 분들이 등단을 거쳐 주로 출간을 했잖아요. 그러다 이런 책의 성공을 보고 평소에 내면에 이야기를 간직하던 분들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제가 비슷한 건) 모두가 뭔가 힘들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요.” 25개국에 판권이 수출된 ‘휴남동 서점’은 한국 문학 수출에서도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끌고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소설은 최근까지 일본과 브라질, 영국 등에서만 각각 3만5000부가량이 팔렸다. ‘아몬드’(손원평),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등과 함께 K문학이 현지에서 단단한 팬층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소설들이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자 최근 수출되는 일부 한국 작품은 출간 경쟁이 붙어 선인세가 2억∼4억 원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황 작가는 “브라질 신문과도 서면 인터뷰를 서너 번 했다”며 “‘휴남동 서점’ 속 등장인물처럼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열망,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바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을 또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저 이야기를 한다’는 자세로 올해엔 새로운 소설 초고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저는 유독 사람이 만나서 변화하는 이야기가 좋아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인과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돼야 일이 일어난다는 불교용어)’이랄까…. 이번에도 그런 얘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삶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삶과 꿈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에게 맞고 편한 삶이 있는 거겠지요. 대체로 고되고 힘에 부치지만 대개 다 지나가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경로를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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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한국-일본-홍콩 ‘은둔형 외톨이’ 150만 명”

    “이미 포기해버린 느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콩에 사는 찰리(19)는 열다섯 살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집에 가뒀다.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사는 30㎡ 넓이 아파트, 그중에서도 작은 이층침대가 그의 세계 전부였다. 밥도 침대 위에서 먹었다. 미국 CNN방송은 최근 찰리를 비롯한 아시아 청년들의 은둔 문제를 다루면서 “홍콩과 일본, 한국에 은둔형 외톨이가 150만 명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CNN이 거론한 3개국은 모두 입시 등 경쟁이 치열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한 나라로 꼽힌다. 찰리는 교사들이 ‘나쁜 학생’을 꾸짖을 때 했던 “그런 식이면 나중엔 거지가 될 거다”라는 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세 나라는 모두 자살률이 아시아에서 6위권에 드는데, 특히 우리 20대의 자살·자해 시도는 최근 수년간 급증 추세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은 청년들이 나약해서 갖게 되는 생각이 아니다. 성적이나 취업, 외모 등 획일적 기준으로 모두를 줄 세우니 이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이나 자라는 아이들까지도 일찌감치 ‘낙오했다’,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과 함께 유난히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문화를 가진 탓인지 ‘비교질’이 잦고, ‘○○계급표’ 같은 게 난무한다. 그러나 성공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이들은 엎어놓은 압정 끝처럼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를 자책으로 몰고 가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지만 압축 근대의 폭력을 앞서 헤쳐온 기성세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누기보단 부아만 돋우는 훈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이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한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의 이론을 빌리면 생리적·안전 욕구 충족에 급급했던 부모 세대가 과거의 경험에 갇혀 애정·소속, 존중, 자아실현 등 욕구의 좌절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다. 자식이 은둔 중이라는 걸 숨기려고만 하다가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스스로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은둔에서 벗어나 다른 은둔 청년을 돕고 있는 한 청년의 말이다. 우울증 경험을 진솔하게 다룬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는 “힘내라는 말, 자신감을 가지고 위축되지 말라는 말은 때론 독”이라며 “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의심 없이 편안하게, 그뿐이다”라고 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은둔하는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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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사고로 죽음 맞은 ‘테헤란의 도살자’

    이란 테헤란 남쪽 하바란엔 묘비가 없는 공동묘지가 있다. 원래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었는데, 1988년 이란 당국이 정치범을 대규모로 처형한 뒤 시신을 가져다 버렸다. 가족들이 발견했을 때 시신들은 매장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란 정부는 추모를 막았고, 무덤을 식별할 수 있는 표지를 없앴고, 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꽃도 심지 못하게 석회와 소금물을 뿌렸다. 최근엔 2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 밖에서 바라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희생자 가족이 구성한 단체 ‘하바란의 어머니들’은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36년째 멈추지 않고 있다. ▷처형은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부터 준비됐다. 희생자들은 이란인민전사(PMOI)나 공산당원 등 좌파들로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정을 전복할 땐 같은 편에서 싸운 이들이었다. 혁명 성공 뒤 반체제 세력으로 몰린 것이다. 주로 평화시위를 하다 체포된 이들이었다. 당시 이란 전역에서 5000∼3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따르면 6인 1조로 지게차에 실려 30분마다 크레인에 목이 매달렸다고 한다. 아이들도 희생됐다. 22일 동안 채찍질을 550번 당한 끝에 숨진 여성도 있었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처형 명령을 내렸고, ‘죽음의 위원회’로 불리는 4인 위원회가 ‘재심’을 해 교수형 판결을 내렸다. 각 판결에 5분도 안 걸렸다고 전해진다. 4인 위원 중 한 명이 19일(현지 시간) 헬기 사고로 외교장관과 함께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다. 1988년 28세로 수도의 검찰청 차장으로 일했던 그에겐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말고도 대(大)처형에 관여한 이들은 이후 승승장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경파인 라이시 대통령은 집권 이후에도 반정부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2022년 22세 여성이 히잡을 느슨하게 썼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겨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500여 명이 숨졌고, 2만2000여 명이 체포됐다.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추락한 헬기에서 죽음은 순식간에 닥쳤을 터이다. “이 쉬운 죽음은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아요. 그들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개처럼 울부짖으며 길고 고통스러운 처벌을 받아야 했어요.” 이란 북서부 라히잔에 사는 한 시민(55)이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밝힌 소감이다. 이런 이들과는 반대로 테헤란의 광장엔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이란의 오래 묵은 한(恨)은 언제나 풀리게 될까.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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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영화 하나가 스크린 거의 100% 독점… 너무 한 것 아닌가

    여러 영화를 상영해야 정상인 멀티플렉스 극장이 또다시 ‘모노(mono)플렉스’가 됐다. 요즘 영화관에 가면 주야장천 ‘범죄도시4’만 튼다. 다른 영화들은 오전에만 반짝 상영하는 탓에 사실상 조조영화가 됐고, 저녁 시간대 등은 거의 100%가 ‘범죄도시4’다. 이 영화의 상영점유율은 지난달 24일 개봉 뒤 80%를 넘었고, 이달 들어서도 70% 안팎이다. 전국에 스크린이 3000개쯤 되는데, 5일에만 2778개 상영관이 이 영화를 1만5002회 틀었다. 스크린을 도배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계에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라는 성토가 나온다. 과거 사례와 비교하면 ‘범죄도시4’의 상영관 독점이 어느 정도인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2017년 영화 ‘군함도’의 상영점유율이 50%대 중반이었다.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2014년)의 점유율은 40%대였고, 최근 1000만 영화인 ‘파묘’도 50%대였다. ‘범죄도시4’의 스크린 독점은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극장으로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는 항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영화관들은 막대한 적자를 봤다. 부채 비율이 치솟았고,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중 2곳이 한때 사실상 자본잠식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계열사의 출자 등으로 연명한 극장들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줄줄이 지방 상영관의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범죄도시4’는 ‘서울의 봄’(2023년), ‘파묘’에 이은 구세주 격이다. 특히 비성수기로 여겨지는 4, 5월의 흥행 성공은 가뭄의 단비와 같을 것이다. ▷‘범죄도시4’를 제외하고 당장 크게 눈에 띄는 영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역으로 다양성 부족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가 극심해졌음을 드러낸다. 박스오피스 10위권 내 우리 영화는 이 영화와 파묘뿐이다. ‘1000만 아니면 쪽박’이라는 말이 현실화한 것이다.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이런 영화에서 제작진이 새로운 시도나 모험을 하기 쉽지 않다. 2021년 30%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68%까지 반등한 한국 영화 점유율이 불안한 이유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을 목표로 하는 ‘중박 영화’나 독립영화도 관객을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나온다. ‘범죄도시4’를 보고 ‘마동석표 액션은 볼만하지만 되풀이되다 보니 슬슬 지루해진다’는 관객이 적지 않다. 이는 곧 한국 영화가 처한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처럼 특정 영화에 일정 비율 이상 스크린을 배정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스크린 상한제 도입을 논의해볼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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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조종엽]한국인이 제일 어려워하는 일 ‘대화와 타협’

    분열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건 정말 한국인의 특성일까. 악의적 편견에 불과하지만 새삼 마음이 무겁다.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대화와 타협의 역량에 일찌감치 한계가 드러나는 일이 잦아서다. 침수 문제가 불거지고도 24년 동안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처지로 방치된 국보 반구대 암각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70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유적이지만 앞서 건설된 울산 사연댐 탓에 침수를 반복하며 훼손돼 왔다. 학계가 대책 마련을 촉구한 2000년 이후에도 원형 보존을 둘러싼 이견, 예산 문제 등에 더해 대구·경북 지자체 간의 물 갈등까지 엮이면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면 지자체 간에 도미노식으로 식수를 끌어와야 하는데 2009년 발암물질 낙동강 유출 사태로 대구와 구미가 물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책이 함께 표류했다. 정치권이 개입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설치는 수리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추진했다가 실패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 최근 환경부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식수 갈등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실정이다.‘힘 대 힘’ 갈등의 패자는 국민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이 팽팽한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기금의 고갈 시기나 이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하면 나온다. 비교적 정해진 미래에 가깝다. 반면 고갈 뒤 부족액을 모두 가입자의 보험료로 충당할지, 재정을 투입할지, 자산소득에도 보험료를 부과할지 등은 가치 판단과 의사 결정의 영역이다. 두 영역이 뒤섞인 채 전문가들이 다투다가 지난해 8월엔 재정계산위원 2명이 사퇴하기까지 했다. 최근 일단락된 국회 공론화위 시민대표단 숙의토론회는 새로운 시도였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대한 대표성이 약한 시민 500명을 ‘대표단’이라고 부르기도, 이들 대상 설문조사 결과가 온전한 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토론회에 관련 참고 자료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등의 뒷말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은 연금개혁 당시 전문가 보고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간담회와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거친 뒤, 정리된 안을 가지고 다시 전국 각지를 돌며 간담회와 토론회를 열어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갈피를 못 잡는 의대 증원 문제는 갈등 관리 실패의 전범처럼 보인다. 지난해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대화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렸다. 의정 대화를 사회적 협의체로 끌고 가는 등 새로운 방식의 공론화가 필요했지만 정부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2000명 증원’을 전격 발표하면서 갈등을 폭발시켰다. 협상 상대에 대한 상호 존중도 찾기 어렵다. 의사 측은 시종일관 집단행동을 통해 힘으로 정부를 꺾을 심산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더니 ‘원점 재검토’만 되풀이하며 의료개혁특위 참여마저 거부한다. 이런 전개에선 누가 이기건 국민은 패자가 될 공산이 크다.타자 입장 생각 않으면 함께 길 잃을 것 “한국인은 너무 극단적이다. ‘끝장을 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너무 무섭다.” 양서를 꾸준히 내 존경받았던 한 출판계 어른이 작고 전 사석에서 가끔 했던 말이다. 그게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기보단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 게다. 이젠 사생결단식 소통을 넘어설 법도 한데, 최근 정치의 양극화와 맞물리며 대화와 타협은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최근 책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 공론장의 포용성을 강조했다. 토의엔 “타자의 관점을 취하고 그의 상황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고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함께 길을 잃을까 두렵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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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콜레라 확산 방지 영웅”… 세계 유일의 韓 중소 백신업체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콜레라 백신을) 아이티로 보낼까요, 시리아로 보낼까요? 아니면 짐바브웨?’”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한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의료 코디네이터의 한탄이다. 최근 수년간 아프리카 등에서 콜레라가 대규모로 확산한 가운데 국제 의료구호 단체들이 모진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예방 백신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원처 선별을 해야 하는 탓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1년 22만여 명까지 감소했던 세계 콜레라 감염자가 이듬해 47만여 명으로 늘었다. 콜레라는 카리브해 연안과 중동, 남아시아 등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케냐의 소말리아 난민촌 어린이들 사이에서, 내전으로 기반 시설이 파괴돼 강물을 마셔야 하는 시리아에서, 무정부 상태가 된 아이티에서 창궐했다. 특히 최근 2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쳐 7개국에서 집계된 것만 4000여 명이 숨졌다. 백신도 동이 났다. 전쟁으로 콜레라 발생 소지가 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공급할 백신마저 없는 실정이다. ▷현재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업이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인도의 회사가 한 곳 더 있었는데, 지난해 생산을 중단했다. NYT에 따르면 유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생산 단계와 성분을 간소화하는 한편 제2공장 가동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올해부터 백신 수천만 회분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엔의 지원을 받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줄리아 린치 박사는 이 회사를 두고 “(콜레라 대응의) 숨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뒤늦게 인도와 남아공의 회사 세 곳이 백신 제조에 뛰어들었지만 빨라야 내년 말부터 제품이 나온다. ▷지난해 매출이 약 700억 원인 중소기업 유바이오로직스는 서울대 수의대 출신 백영옥 대표가 2010년 설립했다. 국제백신연구소와 기술이전 계약을 맺은 뒤 2015년 WHO 인증을 받고 이듬해부터 콜레라 백신을 수출하며 자리를 잡았다. 질병 퇴치를 목표로 하는 게이츠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수출용 코로나19 백신도 개발했고, 해마다 연구개발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다른 백신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중이라고 한다.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부유한 나라에선 거의 유행하지 않는다. 빈국의 전염병이다. 최근 극단 기후 탓에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홍수로 상하수도 시설이 파괴되거나 가뭄이 들어 깨끗한 마실 물도 모자란 상황이다. 콜레라 백신은 당분간 공급이 달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은 별 관심이 없다. 개당 수 달러에 이문도 적은 탓이다. 그 결과 콜레라와의 전투에서 승부가 사실상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 달린 형국이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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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쌍둥이 버스, 묵언 유세… 위성정당 선거운동 꼼수

    ‘한 당인 듯 한 당 아닌’ 총선 선거운동이 4년 전에 이어 다시금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4·10총선을 앞두고 각각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위성정당을 또 꾸린 탓이다. 공직선거법은 후보자 등이 다른 정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걸 금한다. 매수된 후보가 상대 후보를 위해 뛰는 등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한데도 모(母) 정당과 위성정당이 연합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한 몸처럼 선거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4년 전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똑같은 디자인의 선거유세용 ‘쌍둥이 버스’를 운영하다 선관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비례대표 후보자는 기호가 적힌 유세 차량을 사용할 수 없는데, 두 정당의 기호이면서 선거일(4월 15일)을 의미하는 1과 5를 버스에 커다랗게 적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선 기호를 빼고 쌍둥이 버스를 만들었다. 모 정당과 위성정당의 기호(이번 총선에선 1, 3번)를 나란히 보여주는 수법은 대신 ‘더 몰빵 13 유세단’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요즘 유세 현장에서 국민의힘을 지원하러 나온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들은 입은 있는데 말은 없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국민 여러분 미래합시다” 등의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멀뚱히 섰을 뿐이다. 침묵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묵언 유세다. 물론 선거법 위반을 피하려는 꼼수다.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가 당 기호를 가리려고 점퍼를 뒤집어 입거나 가슴에 스티커를 붙였던 것과 비슷한 촌극이 재현되는 모양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위성정당을 직접 홍보할 수 있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못 한다. 한 위원장은 불출마했지만 이 대표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 신분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의 경우와는 반대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최근 공개 석상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 24번 서승만이었습니다. 24번까진 당선시켜야지요”라고 말했다가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국민의미래 후보도 ‘불러서는 안 될’ 국민의힘 후보 이름을 연호하다 지적을 받았다. 이 당이나 그 당이나 마음속으론 어차피 한 당이니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합헌으로 판단하면서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막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데도 두 거대 정당은 방지책은커녕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고 선거법을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가며 양당 체제만 강화하는 중이다. 입법자들이 앞장서 국민과 법을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갈수록 우스워지고 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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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중2 모집책까지 고용한 도박사이트

    온라인 불법 도박 범죄자들은 회원 모집책을 ‘총판’이라고 부른다. 최근 중학교 2학년 학생들마저 총판으로 고용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5000억 원대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중고교생 12명을 모집책으로 썼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친구를 도박에 끌어들이거나 텔레그램 채팅방 등에서 도박사이트를 홍보하도록 했다. 말이 좋아 총판이지 경찰에 붙잡힐 위험을 해외에 있는 총책 대신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쓴 것이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잡고, 자, 돈 놓고 돈 먹기.’ 교묘한 눈속임으로 행인들의 쌈짓돈을 뜯어내던 과거 야바위꾼도 아이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틈을 비집고 아이가 머리를 들이밀면 야바위꾼은 사설(辭說)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를 끼워 넣었다. 요즘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 보니 범죄자들이 아이들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도박을 권한다. ‘도박으로 한 번에 큰돈을 벌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범죄자들 탓에 도박이 교실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 청소년 사범, 중독 환자, 상담 수가 모두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들은 친구 얘기를 듣고 마음이 동하거나, 공짜 웹툰과 드라마를 보려고 접속한 불법 공유 사이트에서 호기심에 배너 광고를 눌렀다가 도박을 시작하게 된다. 도박에 중독된 아이가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거나 절도, 온라인 사기 등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청소년이 청소년에게 도박비를 고리로 빌려주는 ‘작업 대출’ 생태계까지 있다고 한다. ▷10대 자녀를 뒀다면 아이가 평범한 게임을 하는 건지 도박에 빠진 건지 눈여겨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하는 온라인 도박은 카지노처럼 딱 봐도 도박처럼 생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사다리 타기나 게임형 도박은 얼핏 봐선 일반 게임 앱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불법 스포츠토토 도박사이트 역시 ‘요즘 아이가 스포츠 경기에 관심이 많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불법 도박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청소년의 뇌는 어른보다 중독에 더 취약하다. 신경세포가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보상 및 여러 중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파민이 어른보다 많이 분비된다. 즉석에서 보상이 생기는 도박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다. 초중고교의 도박중독 예방 교육은 2022년부터 음주 흡연 마약 등 다른 예방 교육과 함께 의무화됐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흡연 등의 예방 교육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교육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성장기에 도박에 중독되면 나중에 헤어나오기도 힘들다. 학교와 학부모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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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조종엽]땜질 처방으론 고갈 못 막아… 낸 만큼 받는 ‘新연금’ 주목

    《최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가 압축한 두 가지 국민연금 개혁안에선 연금 기금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론화위는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행 소득의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40%에서 50%로 늘리는 ‘1안’과, 내는 돈을 12%로 늘리고 받는 돈은 지금대로 유지하는 ‘2안’을 내놨다. 더 많이 받는 1안은 연금 재정수지가 장기적으로 오히려 나빠진다. 2안 역시 재정 건전성을 담보하기엔 역부족이다. 1, 2안은 각각 기금 고갈 시점을 2055년에서 2062년, 2063년으로 7, 8년 미룰 뿐이다.》국민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각에선 기금 고갈 이후엔 수급자들에게 줄 보험료를 해마다 가입자들에게 걷는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제5차 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부과방식 전환 뒤 현행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할 때 매년 급여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보험료는 2060년 29.8%, 2080년 34.9%에 이른다. 보험료율이 35%면 월 소득이 300만 원일 때 세금과 다른 보험료를 제외하고 국민연금보험료로만 약 105만 원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보험료율을 공론화위 안처럼 3, 4%가 아니라 아예 현행의 두 배인 18%로 대폭 올린다고 가정해도 비슷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기금 고갈 시점은 2080년대로 연기되지만 이후 세대는 여전히 30∼40%의 보험료율을 감당해야 한다. 부과방식으로 연금을 안정적으로 지급하려면 합계출산율이 2명은 돼야 한다. 그래야 뒷세대가 적절한 보험료로 비슷한 인구의 앞세대를 부양할 수 있다. 출산율이 1.8명인 프랑스도 지난해 연금 수급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2년 늦추는 개혁을 단행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진통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은 출산율이 올해 0.7명도 안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도 극적 상승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 같은 문제는 국민연금이 처음부터 앞선 세대가 낸 보험료와 운영수익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도록 설계된 데서 비롯됐다. 개혁이 지연되고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의 덫에 빠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보험료율 조정을 뛰어넘는 제도 자체의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내후년 이후 출생아들, 낸 연금 절반도 못 받아”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이강구(47) 신승룡(36) 연구위원이 ‘KDI 포커스’ 보고서를 통해 파격적인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기금 고갈 우려가 없는 ‘신(新)연금’을 출범시키자는 제안이다. 핵심은 미래세대도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이른바 ‘기대수익비 1’의 연금이다. 현 연금의 세대별 기대수익비를 살펴보자.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만 60세가 되는 1964년생 이전 세대는 기대수익비가 ‘2’가 넘는다. 누군가 보험료로 1억 원을 냈고, 그 운용수익이 1억 원이라고 치면, 연금 급여는 4억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연금에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지만 고소득자의 기대수익비도 1이 넘는다. 이런 초과 수익은 미래세대가 감당해야 한다. 기대수익비는 점점 하락해 올해 만 20세가 되는 2004년생은 ‘1’까지 떨어진다. 기금 고갈 이후 앞선 세대의 급여를 충당하기 위해 보험료가 급격히 오르는 탓이다. 그래도 이들 세대까진 적어도 낸 돈과 운용수익만큼은 급여로 받을 수 있다.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부턴 기대수익비가 ‘1’ 아래로 떨어진다. 내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기대수익비가 약 ‘0.5’이고, 이후 아이들은 쭉 ‘0.4’대다. 누군가 낸 보험료와 운용수익이 6억 원이라고 칠 때 급여는 3억 원도 못 받는다는 뜻이다. 미래세대가 이런 구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적적인 출산율 회복이 없다면 국민연금은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편에선 베이비붐 세대의 기대수익비가 ‘2’에 가까운 건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부모를 봉양했으면서도 자식으로부턴 부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대이고, 빈곤율도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초연금을 개혁해 대응할 문제라는 의견이 나온다.● “적립된 만큼 가져가는 DC형 연금 필요” ‘기대수익비 1’의 신연금을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줄 돈을 미리 정해 놓지 말고 받을 시점에 납부한 보험료와 운용수익만큼만 급여로 지급하는 것이다. 이를 확정기여형(DC)이라고 한다. 현 연금은 연금 가입 이력 등으로 나중에 받을 급여가 미리 정해지는 확정급여형(DB)이다. 그러나 전체 연금 차원에선 DB형은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수십 년 뒤 인구와 경제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금 재정을 5년마다 새로 추계함에도 매번 재정수지 전망이 악화하는 것도 그 탓이다. KDI 연구진은 신연금은 수급 시작 시점에 해당 세대의 기대여명에 따라 급여 수준을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적립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면 기금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설계하기 나름이다. 연구진은 “보험료율을 15.5% 안팎으로 하면 2006년생부터 현행과 같은 소득대체율 40%의 급여 수준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둘째, 빚이 쌓여 가는 현 연금과 단절하는 일이다. 국민연금 기금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이르는 1036조 원으로 커졌지만 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기에도 부족하다. 현 연금이 당장 문을 닫고, 추가 가입도 납부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2045년까지만 약속한 급여를 줄 수 있다. 이듬해부터 모든 가입자가 사망할 때까지 줘야 할 연금액(미적립 충당금)이 올해 가치로 환산해 609조 원(GDP의 26.9%)에 이르지만 이 돈은 없다. 기존 가입자가 보험료를 계속 내도록 할 경우엔 미적립 충당금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줘야 할 돈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전영준 한양대 경제금융대 교수는 이 ‘암묵적 부채’의 규모가 지난해 가치 기준 1825조 원에 이른다고 최근 연금개혁 세미나에서 밝혔다. KDI 보고서는 현 연금은 계정을 분리하고 추가 납부를 중단한 뒤 국가 일반재정을 투입해 미적립 부채를 충당하자고 제안했다. 연구진은 “기금운용수익을 5%로 잡으면 해마다 30조 원씩 투입해도 600조 원의 뭉칫돈을 넣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며 “당장 재정을 투입해야 기대수익비가 상대적으로 큰 현세대도 미래세대의 부담을 나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갈 이후 위험 과장’ vs ‘낙관 기대 안 돼’ 신연금 구상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신연금은 공적연금의 가치인 ‘세대 간 연대’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최저보장 연금에 대한 고민도 엿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강구 연구위원은 “신연금도 개인 계좌가 아니라 연령이 같거나 비슷한 집단(코호트)을 묶어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대 내에서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다”며 “현 세대 저소득층의 부양 부담을 인구도 적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정부 재정을 신연금이 아니라 현 연금에 투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가 지나간 뒤 2070년대가 되면 인구구조가 안정화되고 그동안 출산율이 오를 수도 있다”며 “현 연금에 재정을 투입해 저소득 가입자와 영세사업장을 지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기금 고갈 이후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분석도 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2050년대 이후 아이들이 줄어들면 교육비 지출을 연금 기금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KDI 연구진은 “최근 25년 동안 경제성장률과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고 기대여명은 길어졌는데, 낙관적 기대를 바탕으로 연금을 개혁해선 안 된다. 신연금 개혁을 하지 않을 땐 현 연금에 투입해야 할 재정 규모가 609조 원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현 국민연금의 미적립 부채 규모가 커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연금이 미래로 가는 길은 지금도 계속 좁아지는 중이다. 지난 정부가 개혁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낸 사이 연금 재정의 장기 건전성은 더욱 나빠졌다. 신연금 제안은 우리 연금이 그나마 ‘젊은 연금’이어서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부터 5년만 지나도 현 연금의 미적립 충당금은 869조 원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강구, 신승룡 연구위원은 “최소한 미래세대가 기성세대의 노후 보장을 위해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해소해야 보험료도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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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 그 뭐 쪼만한 백”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KBS 박장범 앵커가 7일 방영된 윤석열 대통령과의 특별대담에서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 명품 가방 수수 논란에 대해 물으며 한 말이다. 자막은 “최근 김건희 여사의 ‘파우치 논란’”이라고 달렸다. 이를 놓고 일부 시청자 사이에서는 ‘명품 백을 왜 명품 백이라고 일컫지 못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먼저 ‘조그만’을 뜻하는 “쪼만한”. 김 여사가 받은 가방의 크기는 작은 것일까 큰 것일까. 한 손으로 잡을 만한 크기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한데도 진행자가 굳이 질문에서 가방이 작다고 강조할 이유가 있는지…. 원래 엄밀함을 요구하는 보도에선 다수가 상식 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크다’ ‘작다’ 같은 형용사엔 ‘…보다’를 붙여 다른 대상과 비교하는 것이 원칙에 맞다. 적어도 ‘비교적’ 등으로 수식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방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의 제품이라는 건 빼놓은 채 그냥 ‘외국 회사’라고 한 것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디올’은 값싼 물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 팩트다. 정식 제품명은 ‘송아지가죽 여성 디올 파우치’. 파우치는 작은 물건들이 가방 안에서 섞이지 않게 넣어두는 별도의 주머니를 가리킨다. 하지만 모양도 그렇고, 아직 ‘백’만큼 뿌리깊게 정착되진 않은 외래어여서 그냥 가방이나 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을 보도한 외신의 경우 로이터통신은 ‘디올 백 스캔들’이라고 썼고, 블룸버그도 ‘디올 백’,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200달러짜리 디올 핸드백’, 뉴욕타임스는 ‘영부인과 디올 파우치’라고 했다. ▷‘방문자가 앞에 놓고 갔다’는 것도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그래서 김 여사가 가방을 받았다는 건가, 안 받았다는 건가? 다수 국민은 김 여사가 악의적 공작에 당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가방을 받은 건 대통령 배우자로서 옳지 않은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주어를 방문자가 아니라 김 여사에 두고 사건의 실체를 궁금해하는 이유다. ‘명품 백(가방) 수수 논란’이라고 이미 통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대통령에게 표현을 바꿔 질문할 이유가 있나.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은 균형성·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방송 심의 규정이다.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출연자가 ‘방문자가 외국 회사의 작은 파우치를 놓고 갔다’고 말을 했더라도, 진행자가 ‘김 여사가 디올 명품 가방을 받았다는 논란’이라고 첨언해 보완하는 게 옳다. 한데 이번 대담에선 진행자가 먼저 무딘 질문을 던졌고, KBS가 당사자 대신 변명해 준 꼴밖에 안 됐다. 많은 국민이 공영방송에 바라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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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가짜가 진짜를 몰아낸다

    다국적 금융그룹의 홍콩지부 직원이 딥페이크(deep fake·인공지능 기술로 정교하게 합성된 인물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에 속아 2억 홍콩달러(약 342억 원)를 송금하는 사기를 당했다고 홍콩 경찰 당국이 2일 밝혔다. 직원은 본사 최고재무책임자(CFO) 및 원래 알던 동료 여럿이 참석한 화상회의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랐는데, 사실은 사기범들이 딥페이크로 조작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음란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로 확산해 미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딥페이크가 뜨거운 감자다. ▷‘맥락을 잘 살피면 딥페이크를 가려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오산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딥페이크가 교란의 도구로 쓰였다. 양국 대통령이 각각 항복하거나 평화를 선언하는 영상을 비롯해 적잖은 딥페이크가 제작됐다. 한데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진이 전쟁 초기 트윗을 분석한 결과 미디어의 진짜 보도에 ‘딥페이크’나 ‘가짜뉴스’라고 잘못된 딱지를 붙인 사례가 조작된 딥페이크 게시물을 잡아낸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2021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선 고교생 치어리더들이 음주, 흡연하는 가짜 영상을 만들어 전송한 혐의로 한 여성이 체포됐다. 영상 속 학생은 ‘명백히 조작된 영상’이라고 했다. 미국 주요 방송사도 학생을 딥페이크의 피해자로 보도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영상은 진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딥페이크의 확산에 기대어 일단 ‘가짜 영상’이라며 잘못을 부인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불확실해지면 사람들이 진실을 더욱 믿지 않게 되는 ‘거짓말쟁이의 배당금(liar’s dividend)’이 생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실수를 모아 놓은 광고 영상을 두고 ‘AI를 사용한 가짜’라며 대놓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이 영상마저 믿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근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음성으로 ‘투표를 거부하라’는 가짜 전화가 걸려오는 등 딥페이크가 만든 혼란이 불신을 낳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딥페이크가 공신력 있는 매체로 유통되면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러시아 일부 지역 TV와 라디오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연설이 방송됐다. ‘우크라이나가 침공했으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크라이나군 또는 반(反)러시아 민병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딥페이크였지만 일부 주민들은 실제로 대피했다. 후방 교란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한국도 총선일에 임박해 악의적인 딥페이크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이 유포되면 사실상 대책이 없다. 딥페이크 등 허위·조작정보를 가려내는 전통 미디어의 어깨가 더욱 무겁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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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횡설수설/조종엽]

    최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제목의 한국 관련 유튜브 영상이 화제다. 미국 베스트셀러 ‘신경 끄기의 기술’(2016년)의 저자 마크 맨슨이 여행기 형식으로 한국 사회의 극심한 경쟁과 정신건강 문제 등을 짚은 영상이다. 착점이 흥미롭다. 영상 도입부는 아파트 이층 침대에서 합숙했던 과거 스타크래프트 게임 프로팀의 집중 훈련을 소개한다. 한국의 케이팝 스타나 운동 선수, 첨단 기술도 이 같은 경쟁 압박을 통해 세계 무대에서 성공했다는 것. 하지만 ‘100점이 아니면 0점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도태되는 이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영상은 한국 사회가 물질주의와 돈벌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주의와 자기표현은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한국인이 물신을 숭배해서 그런 게 아니다. 양극화한 노동 시장이 고착돼 모두가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달려야 하는 탓이다. 선점한 이들만 ‘지대(地代)의 이익’을 누리다 보니 영상 속 전문가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항상 실패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일부 대목은 다소 피상적인 느낌도 든다. 영상은 ‘유교적 수치심(shame)과 (타인에 대한) 비판(judgement) 문화’가 문제라고 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남의 평판을 의식하는 걸 중시하는 건 그나마 물질주의가 한국을 모두 좀먹는 것을 막는 방패다. 오히려 미국에서 대낮에 마약에 찌든 이들이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현실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해독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가족을 중심에 놓고 사는 것이 문제’라고 짚은 건 앞뒤 맥락을 더 살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압축적 발전을 하며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지워 왔다. 가족 안에서 특히 여성이 양육을 하며 미래 노동력을 키웠고, 살림을 하며 현재의 노동력을 재생산했고, 노인을 부양하며 과거의 노동력을 책임졌다. 하지만 과거 한국 사회는 이를 무시했다. 노동력이 스타크래프트의 SCV(일꾼)처럼 마우스를 클릭하면 만들어지는 셈 쳤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고 가장이 가족을 부양하는 구조가 해체되면서 각종 사회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인 미국도 우리보다 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 마약 이민 범죄 총기 등 많은 사회문제를 갖고 있다. 우울증 유병률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말은 충격 요법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제작자 맨슨의 격려 섞인 믿음처럼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관용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삶이 각자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개성적으로 살아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패자가 부활할 수 있게 안전망도 촘촘히 구축해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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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조종엽]“내 속엔 울음이 산다”… 美 에미상 휩쓴 ‘성난 사람들’

    “가능하다고 보세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올해 미국 에미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에이미(앨리 웡)는 상담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업가인 에이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행복을 포기했다는 분노와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가난한 건축업자인 대니(스티븐 연)는 부모를 다시 미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되는 일이 없다.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린 두 사람이 사소한 시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악연을 키워 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 같다. ▷외로움, 불안, 죄책감, 질투, 자기혐오, 인정 욕구….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 취약한 것이 사람의 자아다. 이 드라마 3화 제목 ‘내 속엔 울음이 산다’는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시 ‘느릅나무’에서 따왔다. “내 속엔 울음이 산다/밤마다 울음은 날개를 퍼덕이며 나와/자신의 발톱으로, 사랑할 무언가를 찾는다”. 피부색이 어떻건 누구나 남모르는 어둠과 공허가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는 갈피를 잡지 못한 분노가 어떻게 상대를 해치는 발톱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가 대거 제작에 참여한 이 드라마의 수상이 특히 반가운 건 그래서다. 감독은 이민자라는 특수성 대신 보편적 고민으로 승부를 걸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루지 않고도 한국계가 만든 드라마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설렁탕집과 깍두기 등 한국적 배경과 소품이 등장하는 건 부차적이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려지는 건 덤이다. 에이미는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돈이 넘쳐나는 백인 조던 앞에선 ‘을’에 불과하다. 조던에게 사업체를 팔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한다. 가족이 극도로 아끼는 시아버지의 유품마저 “얼마면 되는데?” “가격이 있을 텐데?”라는 조던의 탐욕에 사실상 빼앗긴다. 에이미가 “분노는 일시적인 의식 상태일 뿐”이라며 화를 잘 참는 이미지를 지켜야 하는 건 아시아계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드러낸다. ▷예측불허의 전개 끝에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과격한 다툼을 통해 비로소 내면에 숨겨두었던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다. 에이미는 말한다. “정상인들이…맛이 간 사람들일 수도 있어.” 마음 건강이 ‘괜찮다’고 자부하는 건 역으로 곪아 있는 감정을 부정하려는 것일 수 있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드라마 1화 제목).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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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중국 GDP가 세계 1위였던 시대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로는 강희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까지의 ‘강희-건륭년간’이 꼽힌다. 그중 건륭제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건륭제는 실질 통치 기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길었던 군주다. 재위(1735∼1796년) 뒤 태상황으로 최고 권력을 행사한 3년까지 더하면 총 63년 4개월이다. 이 기간 청나라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경제 규모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해 세계 제일이었다. 건륭제는 청나라 영토를 최대로 넓혔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 옹친왕(옹정제)이 강희제의 여러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로 간택된 데에는 홍력(건륭제)의 덕이 컸다고 한다. 청고종실록에 따르면 강희제는 열두 살 손자 홍력을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그의 총명함에 반했던 것. 강희제는 ‘후계자가 어떤 아들을 두었는지’ 중요시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눈에 들려는 옹친왕의 치밀한 계획이 성공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24세에 황위에 오른 건륭제는 황태후와 황비, 외척, 환관의 정치 개입을 철저하게 막으며 권력을 공고하게 다졌다. 어머니인 황태후의 생일엔 앞에서 몸소 춤을 추고 막대한 돈을 쓰는 등 효자 역할을 했지만 황태후가 정치에 나서는 건 철저하게 막았다. 이런 명도 내렸다. “황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 자금성 밖에서 들려오는 일은 누구도 태후께 보고해서는 안 된다.” 황태후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한 것이었다. 어느 날 황태후가 한 사찰을 수리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태후를 모시는 태감(고위 환관)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족치기도 했다. 건륭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다양한 역사서를 공부하며 태후의 힘을 빌려 일을 도모하려는 무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륭제도 말년에 사치를 부렸고, 고집불통에 기고만장해서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고 스스로 그 성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학자가 펼친 강연을 정리한 책이어서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느껴지고 읽기가 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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