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가족과 공동체의 두 얼굴…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

  • 동아일보

1999년 발표한 첫 단편소설집
여성에 대한 폭력의 양상 탐구
◇남극/클레어 키건 지음·허진 옮김/344쪽·1만6200원·다산북스


12월의 어느 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도시로 향한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면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어서. 남편에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아파트에 도착한 그는 ‘밀회’를 즐긴다.

평범한 불륜 이야기처럼 보이겠지만, 소설은 여자가 뜻밖의 사건에 말려들며 서사의 흐름이 급격히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끔찍한 결말은 예고 없이, 그러나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1년)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클레어 키건이 1999년 데뷔작으로 발표한 단편소설집이다. 책에 실린 작품들은 키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아일랜드 농촌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는 폭력의 양상을 탐구한다.

하지만 국가와 제도의 억압 아래 스러져간 소녀를 위해 연대할 남성을 배치한 중·후기 작품과 달리, 20대 젊은 시절의 키건이 그려낸 세계는 훨씬 냉혹하다. 곳곳에서 잔인한 남성성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살인과 배신, 아이의 실종과 광기 등 극단적인 사건과 함께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각 단편은 짧지만 자명하다. ‘진저 로저스 설교’에선 성적 호기심을 가진 소녀의 선택이 한 남자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 넣는다. 사건의 무게를 인식하지 못하는 소녀의 시선과,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교차된다. 외도를 일삼는 남편에게 아내가 복수하는 ‘남자와 여자’,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을 기괴한 장치로 밀어붙이는 ‘여권 수프’ 등에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드러난다. 키건은 인물들의 심리를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장면을 통해 불안과 슬픔을 신비롭게 부각한다.

이 소설들의 결말은 대체로 미묘하다. 완결된 교훈이나 단정적인 마무리 대신 독자가 이야기를 곱씹으며 상상하도록 여백을 남긴다. 읽고 나면 속이 더 답답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인물과 사건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다. 예상치 못한 방향이어도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어떤 단편이 가장 인상적인지를 두고 팬들도 의견이 갈릴 만큼, 작품 15편은 저마다의 개성이 선명하다.

#단편소설#클레어 키건#가족 폭력#남성성#심리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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