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는 글로벌 해상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일 뿐만 아니라 전략 요충지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는 전 세계 해운 물동량의 5~6%가 지나간다. 연간 2700억 달러(388조5570억 원)에 이르는 미국 컨테이너 물동량의 40%와 중국 화물 운송량의 21%가 각각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다.
전체 길이가 82㎞에 이르는 파나마 운하에는 5개 항구가 있다. 콜론 컨테이너 터미널(에버그린 해운·대만), 만사니요 국제 터미널(SSA 마린·미국), PSA 파나마 국제터미널(PSA 인터내셔널·싱가포르), 크리스토발항(파나마 포트 컴퍼니·홍콩), 발보아항(파나마 포트 컴퍼니·홍콩) 등이다. 이중 태평양 쪽의 발보아 항과 대서양 쪽의 크리스토발 항이 파나마 운하의 핵심이다. 파나마 운하의 양끝 출입구에 있는 두 항구가 막힐 경우 선박들이 운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콩의 재벌 기업인 CK허치슨홀딩스의 자회사인 파나마 포트 컴퍼니는 1997년부터 두 항구를 운영해 왔다. CK허치슨홀딩스는 네덜란드, 영국 등 24개국에서 53개 항구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항만 회사다. 이 회사는 친중국계 재벌이자 홍콩 최고 부호인 리카싱 청쿵(長江)그룹 회장의 소유다. 중국 정부는 2020년부터 홍콩에서 강력한 국가 보안법을 제정·시행하면서 홍콩 기업들도 중국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가게 됐다.
트럼프 “파나마 운하 되찾겠다” 이때부터 미국 정치권과 미군 내부에서 중국의 파나마 운하 장악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군이 필요에 따라 두 항구를 군사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안보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가 급변 사태 등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 회사를 압박해 상업과 군사 화물 운송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미국 동부에서 상선이나 해군 군함이 한국, 일본, 대만, 남중국해 등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갈 때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면 남미 대륙을 우회해서 갈 수밖에 없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다니엘 룬드 수석부소장은 “파나마 정부가 파나마 운하 전체를 통제하고는 있지만 중국 정부가 홍콩 기업에 군사작전을 돕도록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반 엘리스 미 육군 전쟁대학 교수도 “중국이 유사시 배를 침몰시키거나 전산망을 교란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파나마 운하를 마비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의회에서도 중국의 파나마 운하 두 항구에 대한 운영권을 미국이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월 20일(이하 현지 시간) 취임사에서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중국으로부터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월 20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사를 말하고 있다. 뉴시스미국 정부는 이에 따라 파나마 정부는 물론 홍콩 CK허치슨홀딩스에 압박을 가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해 2월 2일 취임 후 첫 해외 방문국으로 파나마를 찾아 호세 라울 물리노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파나마 운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자 CK허치슨홀딩스는 지난해 3월 4일 파나마 운하의 두 항구 운영 지분 90%를 포함해 전 세계 43개 항구 자산을 미국 기업인 블랙 록 컨소시엄에 228억 달러에 매각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CK허치슨홀딩스의 매각 계획에 분노하면서 상무부,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 등에 거래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홍콩 대공보는 “CK허치슨홀딩스가 전체 중국인을 배신하고 미국의 압력 앞에 비굴하게 굽신거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CK허치슨홀딩스에 대해 반독점 조사에 나서자 CK허치슨홀딩스는 지난해 4월 두 항구의 매각을 보류했다.
미국 손 들어준 파나마 대법원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파나마 대법원이 1월 29일 CK허치슨홀딩스의 자회사가 보유한 파나마 운하의 두 항구 운영권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파나마 감사원은 CK허치슨홀딩스의 자회사가 두 항구 운영권을 2022년에서 2047년까지 25년간 연장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정황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파나마 감사원은 운영권 연장 이후 CK허치슨홀딩스의 부적절한 행위로 정부가 3억 달러(4314억 원)의 손실을 입었고, 향후 25년 간 12억 달러(1조7257억 원)의 손해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파나마 대법원은 파나마 정부가 두 항구의 운영권을 경쟁 입찰 없이 CK허치슨홀딩스의 자회사와 연장 계약한 것은 특혜를 준 것이라면서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CK허치슨홀딩스의 자회사는 두 항구의 운영권을 박탈당했다. 파나마에선 대법원이 위헌 여부를 최종 판단한다. 파나마 대법원의 판결은 미군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한 지 20여 일만에 나온 것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파나마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미국 패권에 굴종한 행위라면서 엄중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은 “이번 판결로 파나마의 사법 독립이 국제사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면서 “어떤 국가는 유아독존식 패권 논리를 신봉하면서 국가안보와 지정학적 전략을 간판으로 해 타국이 자기 뜻에 복종하도록 하고 제3국 기업을 탄압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중남미 지역의 전략 거점인 파나마의 항구들을 사실상 미국에 빼앗겼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펑 난징대 국제관계학원 원장은 “이번 판결은 미국 정부의 압박에 따른 것”이라며 “미국의 의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에 따라 중남미의 항구·석유·광물 등 핵심자원을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이번 파나마 대법원의 판결과 관련해 CK허치슨홀딩스 차원의 대응조치가 제한적이라면서 국제사법재판소(ICJ)나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려면 중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CK허치슨홀딩스가 다른 국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 해도 파나마가 ‘주권면제(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원칙)’를 주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에 나선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지난해 2월 2일 파나마 운하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파나마 대법원 판결은 중국의 상당한 외교적 패배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그동안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파나마에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다. 파나마는 2017년 오랜 수교국이었던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끊고 중국과 수교했다. 시 주석은 2018년 파나마를 처음으로 국빈 방문해 무역, 인프라 등에서 돈 보따리를 안겼다. 당시 파나마는 중남미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동참했었다. 이후 중국은 파나마를 교두보 삼아 중남미 진출에 박차를 가해왔다. 중국의 중남미 교역액은 2000년 120억 달러(17조2668억 원)에서 지난해 처음으로 5000억 달러(719조6500억 원)를 돌파하는 등 42배나 늘어났다. 중국은 브라질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의 최대 무역국이 됐다.
시험대 오른 中 중남미 전략 이번 판결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파나마에 대한 모든 투자를 중지하는 등 보복 조치에 들어갔다. 미국 블룸버그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정부가 국유기업들에 파나마에서의 신규 프로젝트 협의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면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무산 위기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현재 중국 국유기업이 파나마에서 진행 중인 인프라 프로젝트는 14억 달러(2조150억 원) 규모의 운하 제4교량과 크루즈 터미널, 지하철 노선 일부 구간 공사 등이 있다.
중국 정부는 이와 함께 자국 해운회사에 추가 비용이 크게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화물의 운송 경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중국 정부는 또 세관을 동원해 바나나와 커피 등 파나마산 수입품에 대한 검사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의 윌리엄 양 동북아 선임 분석가는 “중국은 이웃 국가들을 결집해 파나마를 고립시키거나 파나마의 특정인이나 기관에 대한 표적 제재 등에 나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번 파나마 대법원의 판결로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소셜미디어 엑스에 “미국은 파나마 대법원이 중국에 대한 항구 운영권 부여를 위헌으로 판결한 것을 고무적으로 보고 있다”라는 글을 올렸다. 서방 전문가들은 서반구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강조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돈로 독트린’으로 중국의 중남미 전략이 시험대에 놓이게 됐다면서 이 지역에서 중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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