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위태로워 더 빛나던 그 시절을 너는 기억하는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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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박연준 지음/264쪽·1만4500원·은행나무

유년 시절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엄격한 부모님, 학교에서의 따돌림, 단짝 친구와의 이별….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그때는 세상이 무너질 듯 마음이 요동쳤던 경험들이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해 온 저자가 처음 선보인 장편소설은 위태롭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짚어간다.

주인공인 일곱 살 소녀 ‘여름’이는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났다. 부모님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여름을 낳았고, 아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여름을 자신의 누나에게 맡겼다. 여름은 그렇게 엄격한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난 새엄마는 여름에게 “넌 못생겼어” “넌 그 옷이 안 어울려”와 같은 날 선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상처를 준다. 아버지와 새엄마 사이에서 배다른 남동생 ‘학자’까지 태어나고, 여름은 질투심과 위기감까지 덤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여름의 버팀목이 돼 주는 건 학교 친구 ‘루비’다. 루비 역시 여름처럼 위태로운 유년을 지나고 있다. 홀로 루비를 키우는 루비의 엄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다. 결국 어느 날 새벽 루비를 두고 가출을 한다. 그 어디에서도 온전한 소속감과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여름과 루비는 서로를 알아보고 단짝 친구가 된다. “화장실이 100개 있는 100평짜리 집에서 산다”처럼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성격 탓에 루비는 늘 학교에서 놀림거리다. 그런 루비에 대해 여름은 “루비는 순간을 채색하고자 했다. 미움을 받더라도, 자기 욕망에 솔직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루비’ 같은 친구가 문득 그리워지는 건 작가의 세밀한 묘사 덕이다. 루비와 다툰 뒤 이유 없이 토하고 코피를 흘리며 아팠던 고통의 순간, 처음으로 손을 모으고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을 때의 그 떨림. 작가의 섬세한 필력을 통해 유년의 기억들이 오감으로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여름과 루비#은행나무#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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