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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반년 그린 작품, 관객은 3초 감상…낙담 끝 ‘맨땅에 헤딩’ 선택한 MZ세대

입력 2021-09-01 15:00업데이트 2021-09-0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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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말, 미대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최지영 씨(30)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최 씨와 그의 동기들이 공들여 그린 회화 작품들을 드디어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날이기 때문. 하지만 전시 당일 최 씨의 기대감은 무너지고 말았다. 길게는 반년 씩 걸려 그린 작품들을 관객들이 감상하는 시간은 3초 남짓. 졸업 후 2014년 타 대학 미대생들과 단체전을 열었을 때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최 씨는 3~6개월 씩 걸리는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한 작업물이 많아 더욱 깊이 낙담했다.

고급 갤러리를 찾는 이들은 그림을 보다 촘촘히 뜯어 보지만 또 다른 문제점이 보였다. 시간과 돈을 써 가며 미술을 즐기는 계층이 정해져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던 것. 왜 미술을 배웠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으로써 학벌이나 계층, 나이, 인종 간 경계를 허물겠다’는 오랜 계획이 떠올랐을 때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세계 애니메이션의 중심지인 미국 캘리포니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2015년 유학길에 오른 최 씨는 올 7월 미국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배급사인 드림웍스의 시각 개발 아티스트(visual development artist)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새로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언어 장벽 속에 ‘맨땅에 헤딩’하듯 미국에 간지 6년 만에 얻은 성과다. 지난달 31일 화상통화로 만난 최 씨는 “뼈를 갈아 넣는다는 생각으로 그림만 그리던 세월이었다. 유학 생활을 힘들게 했던 경제적 부담과 추방 위기를 떠올리면 아찔하다”며 웃었다.

최 씨는 당초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리타에 있는 예술전문학교인 캘리포니아예술대학(Calarts) 입학을 목표로 미술과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월트 디즈니가 세운 이 ‘꿈의 학교’만 나오면 어디든 애니메이션 디자이너로 취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미국에 가보니 소위 ‘학벌’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는 한국과 전혀 달랐다. 유학생 신분이라 돈을 못버는 상황에서 2억 원에 이르는 Calarts의 학비도 부담이었다. 최 씨는 “노력 끝에 Calarts에 합격했지만 2018년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진학해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쌓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던 지난해에는 코로나로 모든 인턴쉽과 취업문이 막혔다. 미국의 팬데믹 상황이 극심해지는 와중에 행정부가 “대면 수업을 받지 않는 유학생은 모두 추방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혀 공포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수많은 회사에 돌렸다. 포트폴리오가 드림웍스 미술 감독의 눈에 들어 연락이 올 정도로 긍정적 신호가 이어졌다. 입사 후 그가 참여한 첫 작업물은 영화 ‘트롤’의 TV 버전인 ‘트롤스토피아(TrollsTopia)’. 10월부터는 새로 론칭하는 TV프로그램에 투입될 예정이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애니메이션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막막했지요. 지금은 순수미술을 전공하며 배웠던 이론과 미술사를 적극 활용하고 있어서 제 선택에 후회 없답니다.”


전채은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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