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어머니의 손맛처럼 은은하고 깊은 글맛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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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지음/268쪽·1만5000원·푸른역사

강세황(1713∼1791)의 표암첩(豹菴帖)에 수록된 ‘무’. 저자는 “가을이 되어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입, 그런 순도 100%의 기쁨이 또 있을까”라며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을 표현한
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세황(1713∼1791)의 표암첩(豹菴帖)에 수록된 ‘무’. 저자는 “가을이 되어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입, 그런 순도 100%의 기쁨이 또 있을까”라며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을 표현한 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겨울 배추는 달다.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하기도 하다. 가을 지나고 서리 내린 후쯤이면 배추 뿌리의 달고 매콤한 기운이 이파리 위쪽까지 쑥 치밀고 올라온다. 된장에 찍어먹으면 알싸하게 단맛이 혀끝을 감돈다.

노상 날로만 먹을 순 없을 터. 저자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는 추운 밤 이웃들이 모여 배추적을 함께 구워먹었다. 물을 끓여 날배추를 데치고 한쪽에선 밀가루를 개고, 다른 쪽에선 들기름 칠할 무를 깎는다. 맑은 간장에 파 마늘을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살짝 친 양념간장은 손맛 좋은 저자 어머니의 몫이었다.

배추적은 깊은 맛을 가진 음식이라고 한다. 깊은 맛을 알려면 반대인 얕은맛을 보면 된다. 얕은맛이란 혀에서만 달아, 먹고 난 후엔 조금 민망해지는 그런 맛이다. 고기나 생선처럼 그 자체로 맛이 뛰어난 음식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깊은 맛은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 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 부위의 심천(深淺)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저자의 설명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음식을 토대로 자연과 인생, 그리고 깨우침까지. 솜씨 좋은 글맛으로 풀어낸 독특한 에세이다. 형용사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풍부한 어휘와 생생한 비유를 담고 있는 책을 읽고 있으면 ‘글’의 내공이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서령체’라 불릴 정도로 자기만의 글 빛깔을 자랑하던 작가의 유고집이다. 우리말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는 저자 덕분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침을 삼키고, 푸근한 시골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김서령 작가.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안동지방 양반가의 내실 풍속과 사랑채 역사를,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감정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손에 잡힐 듯 묘사하는 작가를 이제 우리 문학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라며 아쉬워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김서령 작가.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안동지방 양반가의 내실 풍속과 사랑채 역사를,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감정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손에 잡힐 듯 묘사하는 작가를 이제 우리 문학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라며 아쉬워했다. 동아일보DB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의 경험이 책을 이끈다. 사실 조선의 3대 조리서라고 꼽힐 만한 ‘수운잡방’(1540년), ‘음식디미방’(1670년) ‘온주법’(1700년)은 모두 안동에서 나왔다. 책이 전해져 온 광산 김씨, 재령 이씨, 의성 김씨 가문은 안동에서 5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아온 유서 깊은 문중이다. 저자는 “그들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제사 받들기와 손님 대접하기)’을 삶의 기본원리로 삼으면서 음식에 들이는 깊은 정성을 그들의 이상인 ‘군자 되기’의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여긴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음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TV프로그램에서 범람하는 ‘먹방’이 결코 주지 못하는 위로를 선사한다. 불린 햅쌀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인 ‘갱미죽’. 이 음식은 햇볕을 실컷 받고 천천히 여문 쌀알을 다시 낮은 열로 뭉근히 익힌 후 오래 묵은 간장을 똑똑 끼얹어 먹는 죽이다. “입안의 엷은 상처를 순하고, 따스하며 다정하게 어쩌면 슬쩍 서러운 듯도 하게,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솨르륵 도포한다”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아플 때 어머니가 끓여주던 흰죽이 떠올라 따스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달지 않지만 들큰하고 맵지 않지만 알싸한 밥도둑 ‘집장’, 음력 오뉴월에 담가 먹던 찹쌀 술 ‘정향극렬주’와 봄을 알리는 ‘냉잇국’ 등 30편의 행복한 음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편인 ‘간고등어’와 ‘헛제사밥’을 쓰다가 그치고 만 저자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저자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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