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我慢 버려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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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펴낸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건네며 시집에 수록된 시 제목을 따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고 썼다. 인터뷰 도중 여러 번 가볍게 웃었다. 온천물에 몸을 담근 듯 초조한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이 탁 풀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문태준 시인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건네며 시집에 수록된 시 제목을 따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고 썼다. 인터뷰 도중 여러 번 가볍게 웃었다. 온천물에 몸을 담근 듯 초조한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이 탁 풀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예닐곱 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나는 내가 좋다/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시 ‘나는 내가 좋다’ 전문)

40대 남자가 제 입으로 “나는 내가 좋다”니, 흉이나 볼 생각에 진짜 볍씨 자국이 있는지 물었다. 문태준 시인(45)은 안경을 벗더니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그는 “잘 보면 볍씨 자국이 보일 거다”라고 했다. 진짜 그랬다.


그는 타작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다 검불이 눈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찬물로 입을 헹궈내더니 혀로 아들의 안구를 핥았다. 그는 “가장 부드러운 살로/혀로/핥아주시던”이라며 시 ‘혀’를 쓰기도 했다.

문 시인이 새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사진)을 최근 펴냈다. ‘먼 곳’ 이후 3년 만이다. 안구의 볍씨 자국을 핥아주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혀처럼 우리네 상처를 핥아주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시집에 담겼다.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인을 만났다. 20년 차 불교방송 PD이기도 한 시인은 “불교의 가르침을 공기처럼 마시고 산다”고 했다. 그의 시도 선시(禪詩)를 닮았다.

‘누구에게라도 미리 묻지 않는다면’에선 눈앞의 새를 마음대로 그리기를 멈추고 새의 의중을 물어본다. “나는 새의 언어로 새에게 자세히 물어/새의 뜻대로 배경을 만들어가기로 했네/새에게 미리 묻지 않는다면/새는 완성된 그림을 바꿔달라고/스케치북 속에서 첫울음을 울기 시작하겠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에선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기 위해선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주울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상대보다 높은, 독보적인 지위에 오르려는 ‘아만(我慢)’을 없애야 한다. 다른 사람, 동물, 사람과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불교적인 사유를 담았다”고 했다.

문 시인은 ‘작가의 말’에 “대상과 세계에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라고 썼다. 연작시 ‘드로잉’ 14편에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드로잉은 단선으로 움직임과 뚜렷한 특징을 선명하게 잡아냅니다. 우리 시의 가능성을 고민하다 관찰로 시를 쓰려고 했어요. 드로잉 화법처럼 시의 언어, 단선의 언어로 사물과 사건을 포착했어요. 동양의 절제, 여백을 시에 담은 것이죠.”

이번 시집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를 찾을 수 없었다. 문 시인은 “슬픔이 감당이 안 돼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말할 수 없음’에서 세월호 희생 학생과 동갑내기 아이를 둔 시인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느껴졌다.

매일 오전 4시면 일어나 아파트 거실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앞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시를 읽고 시를 짓는다. 동트는 창밖으로 반짝반짝 깨어나는 것들을 보며 시 ‘여행자의 노래’를 썼다.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그는 “세사(世事)를 어느 정도 끝내고 시 쓰는 시간만이 내게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며 “시를 쓰지 않으면 목욕을 하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고 좋은 시를 쓰면 온천한 듯 개운하다”고 했다.

시집엔 시 61편이 수록됐다. 몇 번이나 온천물에 몸을 담갔을까. 그는 “매번 온천한 것 같았다”며 수줍게 웃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문태준 시인#나는 내가 좋다#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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