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광영]정의는 보여져야 한다

  • 동아일보

신광영 논설위원
신광영 논설위원
12·3 계엄 날 밤 국회 본회의장은 의장에게 계엄 해제 표결을 재촉하는 의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뭐해요? 그냥 처리합시다!” “거수나 기립으로 하면 되잖아요!” “계엄군이 본회의장 앞까지 왔다고요!” 당시 무장 군인들을 보좌진과 직원들이 막고 있었지만 본회의장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초유의 상황인 만큼 어떻게든 통과부터 시키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안건 상정조차 안 된 상태였다. 우원식 의장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본회의 그 프로세스대로 하십시다.”

절차의 힘으로 계엄 제압했는데…

그러자면 의석 단말기, 투표기 등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돼야 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많은 직원들이 국회에 못 들어오거나 계엄군과 대치 중이었다. 고작 몇 명이 익숙지 않은 일을 동시에 떠맡아야 했다. 내부 전산망도 막혀 있었다. 계엄 해제 의결안을 의원들이 볼 수 있게 띄우려면 국회 본청 몇 층 아래 사무처에서 USB에 파일을 담아와 수동으로 연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선 한글파일과 PDF 버전이 모두 필요했지만 직원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한글파일만 가져왔다. 그 바람에 다시 계엄군을 뚫고 내려가 PDF로 변환해 오는 일도 있었다.

가까스로 표결 준비는 마쳤지만 여야 협의로 정한 본회의 개회 시간까진 4분이 남아 있었다. 계엄군이 본회의장 문을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당장 표결하지 않느냐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우 의장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저서에서 “그 몇 분간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고 했다. 1분 1초 피가 타들어 갔다고도 했다. 표결은 공지대로 오전 1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그날 밤 계엄군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치열했던 건 ‘프로세스’를 지키려는 투쟁이었다.

절차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느라 피가 말랐던 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때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늦어지면서 국민들은 초조함과 싸우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 토대 위에서 재판관 8인 만장일치 결정이 나왔다. 문형배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판결문도 8명이 다 고치면서 한 명 한 명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고 했다. 헌재가 왜 빨리 선고하지 않느냐는 일각의 압박에 만장일치를 포기했다면 당시의 반탄 여론을 잠재우진 못했을 것이다.

잘 지켜진 절차는 상대를 승복시키는 힘이 있다. ‘정의는 지켜져야 할 뿐 아니라 정의롭다고 보여져야 한다’는 법언은 절차적 정의가 곧 실질적 정의를 낳는다는 걸 강조한 말이다. 정의의 외관을 갖추고 있어야 심판을 받는 쪽이 결과에 수긍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불의인지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절체절명 상황에서도 국회 직원들이 PDF 파일을 다시 챙겨오고, 헌재 재판관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지를 모았던 것도 정의의 외관을 완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국회에서 해제시켜도 2번, 3번 계엄 하면 된다”고 했던 윤 전 대통령을 멈춰 세운 건 이런 절차의 힘이었다.

‘정의의 외관’ 내팽개친 여당 사법개혁안

요즘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등 사법개혁 법안들에는 공통된 발상이 깔려 있다. 내란 척결이란 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정의롭게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인식이다. 사법부 등 각계에서 위헌 소지를 지적했고, 당내 의원들도 우려했지만 법사위 여당 의원들은 상임위 처리를 강행했다. 그 정도로 절차적 정당성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법이 급조되면 계엄 세력의 역공을 허용하는 건 물론, 국민들이 어렵게 지켜낸 법치 질서마저 훼손할 수 있다.

1년 전 국회 본회의장 문밖에 계엄군이 몰려들 때도, 윤 전 대통령이 용산 관저에서 막무가내로 버틸 때도 우리는 절차를 건너뛰려는 유혹을 견뎌 냈다. 그런데 여당은 도대체 무엇에 쫓기고 있기에 졸속 입법에 집착하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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