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보령 고대도 아이들의 송년인사… 육지야, 메리 크리스마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2일 03시 00분


청룡초등학교 고대분교는 이 아이들이 있어 폐교의 고비를 넘겨왔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를 떠올릴 수 없듯. 아이들에게도 학교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가 없다. 집에서 나와 몇 발짝만 떼면 도착하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미래를 꿈꾼다. 왼쪽부터 찬민(미취학), 혜승, 민주, 경민.
청룡초등학교 고대분교는 이 아이들이 있어 폐교의 고비를 넘겨왔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를 떠올릴 수 없듯. 아이들에게도 학교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가 없다. 집에서 나와 몇 발짝만 떼면 도착하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미래를 꿈꾼다. 왼쪽부터 찬민(미취학), 혜승, 민주, 경민.
고대도(古代島) 아이들은 딱 다섯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박 씨다. 넷의 아빠는 박원열 목사(46)고, 한 명은 박종관 교사(47)의 아들이라 그렇다. 성씨는 같은데, 정작 피가 섞인 아이는 아무도 없다. 박 목사네 4남매가 모두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은 섬의 활력소다. 아이들이 깨면 섬도 깨고, 잠을 자러 들어가면 섬도 고요해진다.
고대도는 안면도 바로 아래에 있는 면적 0.9km²의 작은 섬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은 8.4km²) 현재 실거주민은 50가구 정도다. 여기도 한때는 부촌이었다. 1970년대 후반 새우 꽃게 멸치 어장이 잘돼 사람 수도 수백을 헤아렸다. 고대초등학교 학생도 덩달아 100여 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반짝 호황은 20년을 채우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어획량이 급감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섬을 떠났다. 학교도 2002년 보령 청룡초등학교의 분교로 편입됐다.
그나마 폐교 위기를 넘긴 건 모두 이 아이들 덕분이었다. 또 학교가 버텨주었기에 아이들은 섬을 떠나지 않아도 됐다. 학교와 아이들의 기막힌 공생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다섯 중 세 명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작은 섬마을

17일 아이들을 만나러 섬으로 갔다. 가는 길은 고됐다. 우선 서울에서 충남 보령시 대천항까지 3시간 가까이 걸렸다. 곁눈질 한 번 않고 차를 몰았는데도 점심 배 출항시간(낮 12시 20분)을 겨우 맞췄다. 대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고대도로 들어가는 배는 하루 세 차례. 그런데 매표소 직원이 표를 주다 말고 묻는다.
“오늘 저녁 배(오후 3시)부터 내일까지 다 결항될 거예요. 그래도 들어가시겠어요?”
바람이 많이 불어서란다. 점심 배를 놓쳤으면 아예 고대도 취재는 물 건너갈 뻔했단 얘기다. 모레도 어찌 될지 모른다지만 일단 표를 끊었다. ‘설마’란 안이한 생각과 함께. 사람과 차를 함께 싣는 배였다. 어림잡아 봐도 사람 수보단 짐짝 수가 훨씬 많으니 화물선이라고 해야 맞겠다. 배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삽시도와 장고도를 들른 다음 고대도에 닿았다. 1시간 40분 만이었다.
섬에 오르니 바람이 더 셌다. 배에서 내린 이는 고작 서너 명. 부두에서 기다리던 두 어르신이 배에 있던 스티로폼 박스 하나씩을 리어카에 실어갔다. 부두 근처에 ‘민박’이라 쓰인 푯말이 눈에 띄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 추위에 이렇게 외진 섬에 놀러오는 사람이 있을까. 동네 슈퍼도 영업을 안 하는지 불을 꺼 놓은 채 인기척이 없었다. 아이들의 환심을 살 뇌물(과자)을 미리 사오길 잘했다 싶었다.
고대도에선 길을 물을 필요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 이유도 없었다. 집들이 부두 근처에만 몰려 있어 10분이면 마을 전체를 돌아보고도 남았다. 더구나 태극기가 높이 걸린 학교는 금방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단층짜리 학교 건물로 들어섰다. 엄기행 교사(51·분교장)와 박종관 교사가 불청객을 맞았다.
“아니, 이 조막만 한 학교에 무신 얘깃거리가 있다고 여까지 오고 그런댜.”
전화기 너머로 몇 번이나 경험한 ‘엄 교사 표’ 타박이다. 취재에 응하기 싫은데도 단호히 “싫다”는 말을 못하던 그였다. 그 대신 “마땅한 잠자리가 없다” “배가 자주 끊겨 못 돌아갈 수 있다”(이는 결국 현실이 됐다) 따위의 엄포로 포기를 종용했었다. 그런데 막상 표정은 밝았다.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데 대한 반가움이 꽤 큰 모양이었다. 이제 꼬마들을 만날 차례였다.

자유로운 아이들

박 교사는 5학년 민주(11·여·박 목사의 첫째)를 가르치고 엄 교사는 2학년 경민(7·박 목사의 둘째)이와 1학년 해승(7·박 교사 아들)이를 맡고 있다. 학생이 3명뿐인데 교사가 둘인 것은 ‘교사 1명이 3개 학년을 동시에 맡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

▼ 트럼펫-코넷 매일 연습… 24일 어른들 모시고 작은 콘서트 ▼

엄기행 분교장(왼쪽)과 박종관 교사.
엄기행 분교장(왼쪽)과 박종관 교사.
2011년 부임한 박 교사는 그해 민주와 경민이를 혼자 가르쳤다. 올해 해승이가 입학하면서 3개 학년이 되자 엄 교사가 추가로 파견됐다. 2년을 채운 박 교사가 해승이를 데리고 육지로 돌아가면 내년엔 엄 교사 홀로 학교를 지켜야 한다. 요즘은 섬마을 선생님에 대한 인식이 한참 달라졌다. 예전엔 마치 뭔가 잘못해서 좌천되는 곳이라 여겨졌지만 지금은 교사들이 줄을 설 정도다. 부임까지의 과정도 만만치 않다. 분교에 가기 위해선 우선 1, 2년 전 본교에 먼저 부임한 뒤 동료 교사들의 평가를 거쳐야 한다. 물론 고대분교의 두 교사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고대분교의 수업은 그야말로 자유롭다. 보통의 학교 선생님들은 이렇다. 한 반에 20∼30명씩 앉아있으면 몇몇에겐 발표도 시키고, 누가 따라오지 못하는지도 챙겨야 한다. 그러다 보면 1교시 40분 수업이 훌쩍 지나간다. 섬 분교에선 사정이 다르다. 민주는 혼자, 경민이와 해승이는 둘이서 수업을 받는다. 1교시 수업 분량을 육지 학교보다 훨씬 빨리 소화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두 달이면 한 학기 과정이 끝난다. 그래서 야외학습이 많다. 교사들은 학교 안 텃밭을 아이들과 함께 가꿨고 토끼도 키웠다. 여건이 될 때마다 산이나 개펄로 가 아이들을 뛰놀게 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시골학교 학생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까.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는 주로 실내에서 지낸다. 선생님들은 우선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많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민주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이날도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남도일의 얼굴을 그럴듯하게 그렸다. 그림을 오려뒀다 저녁에 엄마한테 보여줄 거란다. 민주는 나중에 커서 요리사가 될지, 화가가 될지 고민 중이다. 그림을 좋아하니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얼마 전 스스로 요리사의 재능을 발견했다.
“아빠 엄마가 집을 비웠을 때 동생들에게 비빔밥도 해줬어요. 계란 넣고 김치 국물 넣고…. 아, 김도 넣었어요. 엄마가 안 가르쳐줬는데도 그냥 했어요. 동생들이 맛있다고 했어요.”
꿈은 또 바뀌기 마련이지만 민주의 고민은 제법 깊어 보였다.
경민이는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마치면 어김없이 말한다. “선생님, 책 읽어도 돼요?” 학업성적도 우수하지만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한단다. 최근엔 특히 원시인들의 얘기에 꽂혔다. 교실 한쪽은 아예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다. 소파와 매트리스가 있어 ‘책 사랑방’이란 이름도 붙었다. 아이들이 앉았다가 누웠다가 제멋대로 책과 놀라는 뜻에서다. 경민이에겐 최상의 환경이다. 책만 좀 더 많아지면 바랄 게 없다. 컴퓨터 게임만 좋아하던 해승이도 경민이를 따라 책 읽기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
이곳 아이들에게 학교는 집이나 마찬가지다. 해승이는 어차피 학교 울타리 내에 있는 사택에 살고, 민주네는 학교 정문과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아침에 교실로 오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지만 단순한 ‘공간이동’일 뿐이다. 학교는 집이고 또 놀이터다. 오죽하면 찬민(4·박 목사의 셋째)이까지 아예 학교에서 살다시피 할까. 선생님들은 또 다른 부모다. 다소 무서운 엄 교사는 아빠, ‘천사 같은’ 박 교사는 엄마 역할이다.

또래의 아쉬움

▼섬은 아이들에게 완벽한 놀이터다. 뭐든 해도 되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남의 집에서 강아지가 태어나도 자기들끼리 이름을 붙이고,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진을 찍은 곳은 밀물에도 잠기지 않도록 새로 만들어진 ‘고대도 다리’다.
▼섬은 아이들에게 완벽한 놀이터다. 뭐든 해도 되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남의 집에서 강아지가 태어나도 자기들끼리 이름을 붙이고,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사진을 찍은 곳은 밀물에도 잠기지 않도록 새로 만들어진 ‘고대도 다리’다.
경민이와 해승이는 늘 티격태격 싸운다. 낯선 아저씨가 있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1학기보단 훨씬 나아졌다는 게 그 모양이다. 해승이는 여전히 까불거리고 경민이는 형이랍시고 큰소릴 친다. 잡겠다는 형과 잡히지 않으려는 동생이 교실을 뱅글뱅글 헤집고 다니면 정신이 없다. 엄 교사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잠시뿐. 천방지축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예상이 안 된다.
해승이는 내년에 아빠 엄마와 함께 섬을 떠난다. 경민이로선 하나 있던 또래 친구를 잃는 것이다. 장난꾸러기 해승이가 얼마나 그리울지 경민이는 모른다. 아직은 이별이 주는 허전함을 미리 알 나이는 아니니까.
사실 어른들은 민주가 더 걱정이다. 민주는 몇 년째 또래 친구 없이 동생들하고만 어울렸다. 가끔 나이보다 어린 행동을 하는 게 그 때문이란다. 박 교사는 “민주는 사실 덩치만 컸지 완전히 아기”라며 “마음은 참 따뜻한 아이인데 가끔은 버르장머리 없이 굴기도 한다”고 했다. 아빠의 마음은 더 안타깝다. 민주가 또래들과 어울려 지냈으면 지금 배우지 못한 것들을 많이 배웠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또 1년만 있으면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그땐 어쩌나 싶다. 민주, 경민, 해승 세 아이는 한 학기에 2, 3번씩 본교에 간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섬마을 아이들에겐 한꺼번에 생긴 수십 명의 친구가 영 낯설다. 특히나 여린 민주는 “○○○랑 △△△가 놀려서 싫어요!” 하는 걸 보면 벌써 몇 번은 상처를 입었나 보다. 박 목사는 “홈 스쿨링을 할까도, 대안학교에 보낼까도 생각 중”이라며 “일반 중학교에 보내더라도 친척집에 부탁을 할지, 다른 대부나 대모를 알아봐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했다.
박 목사가 아내 성효경 씨(43)와 고대도로 온 것은 2006년 2월. 돌이 갓 지난 경민이를 안고서였다. 민주는 그해 5월 데려왔다. 만 5세 때였다. 당시 고대분교엔 너덧 명의 아이가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대부분 고학년이었다. 2009년 이선우 씨(46) 자녀들(초6, 초4)이 육지로 전학을 가 2학년 민주는 혼자가 됐다. 민주가 없었다면 고대분교는 사라졌을 거란 얘기다. 누나 덕분에 경민이도 편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다. 대신 누나가 졸업한 뒤엔 경민이가 홀로 학교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셋째 찬민이가 무사히 입학할 테니까. 박 목사네가 얼마나 오래 고대도에 살진 모르지만 19개월 된 막내 민솔이도 언니 오빠들 덕에 학교가 없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터다.
박 목사 부부는 바라본다. 이 아이들이 학교를 지켜내는 동안 다른 아이들이 몇이라도 함께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안 되면 한두 달간 배낭여행을 다녀서라도 세상과 부딪쳐보게끔 할 계획이다. 부부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자유’라는 선물을 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더 늦기 전에 ‘어울림’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싶다.

섬마을의 크리스마스

올 크리스마스엔 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고대도 교회에서 작은 잔치가 열린다. 잔치라고 하긴 뭣하지만 박 목사가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저녁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 어르신들을 모실 예정이다. 섬 전체에 초대장을 보냈으니 아마 수십 명은 올 거다. 민주와 경민이는 이날 각각 트럼펫과 코넷(트럼펫보다 조금 작은 금관악기) 연주자로 나선다.
지난해 12월 목사와 전도사들로 이뤄진 ‘힐링 밴드’가 고대도를 찾은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쯤이었다. 멤버 중 한 명이었던 김성혁 목사의 눈에 띈 것이 민주였다. 처음 만져보는 트럼펫 소리를 곧잘 내는 거다. 김 목사는 당장 악기를 가르칠 것을 권했다. 박 목사도 ‘악기 하나쯤은 다뤄야지’란 생각에 덜컥 수십만 원짜리 중고 트럼펫을 질렀다. 경민이에겐 코넷을 사줬다. 김 목사는 이후 고대도에 수시로 들러 민주와 경민이에게 악기를 가르쳤다. 민주는 매일 오후 6시 반부터 1시간 동안 시간을 정해두고 연습을 할 정도로 열심이다. 경민이는 “저번엔 콘플레이크를 반이나 먹었다” “아빠 엄마한텐 친절하면서 우리한텐 무섭다”처럼 김 목사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지만 악기 자체는 싫지 않은 모양이다. 이젠 서로 호흡을 맞출 정도로 둘의 실력이 늘었다.
박 목사는 매해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아이들의 재롱잔치를 열었다. 섬에는 기독교 신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모두 한자리에 불러 축제를 즐겼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떠나 재작년 한 해를 걸렀더니 이내 “왜 초대 안 하냐?”는 소리가 나왔다. 작년 예배 땐 음식 하나 없이 심심하게 지나간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올해는 조촐하게나마 떡과 과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고대도 아이들에겐 어쨌거나 신나는 일이다. 공식석상에서의 첫 연주를 앞둔 민주와 경민이는 다소 긴장되겠지만 그보다 더한 추억은 없을지 모른다. 개구쟁이 해승이에게도 고대도에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게 분명하다. 18일 고대도엔 하얀 눈발이 아주 조금 날렸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때 묻지 않은 섬마을 아이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 조선 첫 선교사 독일인 귀츨라프, 1832년 고대도서 감자 재배기술 전수 ▼

“1832년 7월 25일. 우리는 그가 알려준 안전한 선착장을 찾으리란 희망으로 항해한 끝에, 폭풍과 안개 속에서 무사히 고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이며 바람막이가 잘된 곳이었다. 고대도에 정박하자 곧 양이라는 사람이 방문하였다.”(‘칼 귀츨라프와 함께하는 고대도 여행’·충남문화산업진흥원, 보령시·2012년)

조선 최초의 선교지

서해안의 작은 섬 고대도는 개신교로서는 매우 뜻깊은 유적지다. 조선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1803∼1851)가 바로 이 고대도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1832년(순조 32년) 7월 25일부터 8월 12일까지 고대도에 머물렀다. 이는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보다 52년, 호러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보다는 53년 앞선다. 그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 한국 사료 7, 8곳에서 발견된다.
독일인 귀츨라프는 모두 3번의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조선 방문은 마카오에서 출발한 2번째 선교여행(1832년 2∼9월) 중 이뤄졌다.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의 507t급 범선 ‘로드 애머스트호’에 선의(船醫) 겸 중국어 통역관으로 승선했다. 배는 7월 17일 황해도 몽금포에 도착했다. 선장은 곧 조선 국왕에게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를 전달했다. 그러니까 애머스트호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서양 선박이었던 셈이다. 배는 이틀 만에 몽금포에서 철수했다. 그러곤 남쪽으로 향하던 중 23일경 녹도에 닿았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이 보다 안전한 항구로 배를 옮길 것을 요구했고, 고대도가 최종 기착지가 된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5,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밝았다. 고대도에서도 한 관리의 도움을 받아 한글 자모를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문 주기도문을 한글로 쓰기도 했다.(그해 11월에는 ‘중국의 보고’란 잡지에 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을 발표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조선인 환자 60여 명을 치료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감자 재배 기술을 전수했고, 야생포도(머루로 추정됨)를 이용해 포도즙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결국 통상 요청을 거절했고, 귀츨라프의 배는 고대도를 떠나야 했다. 애머스트호는 8월 17일 제주도에 들른 것을 마지막으로 조선과 작별했다.

귀츨라프를 기리는 교회

고대도 교회는 1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관을 마련해 두었다.
고대도 교회는 1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관을 마련해 두었다.
고대도 교회는 1982년 귀츨라프의 첫 복음 전파 150년을 기념해 세워졌다. 그래서 이 교회의 다른 이름은 ‘고대도 귀츨라프 기념교회’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으로 박원열 목사는 10대 목사다. 30년 만에 사역자가 10명째니 많이 바뀐 편.
고대도 교회는 귀츨라프 기념관을 2층에 따로 마련해 두고 있다. 이곳에는 귀츨라프의 선교활동이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사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고대도는 최근까지도 기독교에 크게 호의적이진 않았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제와 풍어제를 지내던 섬이었으니까. 그나마 있던 신도들은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뭍으로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한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10명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 박 목사의 헌신 덕에 지금은 신도가 25명 정도로 늘었다. 그리고 귀츨라프 교회를 단순한 예배당이 아닌, 고대도 전체의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귀츨라프 선교 180주년인 올해엔 청룡초등학교 고대분교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졌다. 귀츨라프가 조선인들과 만나는 장면, 그가 전한 성경과 감자, 포도즙 등이 그림에 담겼다. 보령시와 충남문화산업진흥원은 8월 기념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박 목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년이 한독 수교 130주년이라고 합니다. 마침 귀츨라프 선교사도 독일인이죠. 기독교사적으로나 한국 근현대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고대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고대도=글·사진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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