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의 향기]조선을 지탱한 전문가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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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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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문가의 일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384쪽·2만3000원·글항아리

수라간 상궁, 기녀, 화가, 의원…. 최근 사극에 등장한 직업이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으로 조명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이 같은 전문직은 역사의 조연에 그친 채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조선 사회를 지탱하고 윤택하게 만들었던 조선 전문가들의 삶을 역사학자 12인이 엮었다.

“한 현에 훈도(訓導·학교의 교원)를 칭하는 자는 100여 인에 이르되 모두 무식자다.”(‘중종실록’ 중에서)

조선은 유학을 근간으로 삼고 ‘군사부일체’를 강조하는 나라였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조선시대 관료로서의 교관 직은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교관에 오른 뒤에는 출사길이 막히는 데다 지방 향교 학장은 녹봉도 지급되지 않는 불안한 신분 상태였다. 이 때문에 교관의 자질이 떨어져 학생이 스승을 가르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서원과 서당 등 사학 역시 양난 이후로는 중앙 정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국가의 관리, 감독 아래 놓인다.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준행정조직으로 변질된 것이다. 조선 후기 몰락한 양반들이 대거 서당 훈장으로 몰려들면서 이들은 스스로를 ‘설경(舌耕·혀로 밭갈이하는 무리)’이라 자조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출세하지 못해 역모나 민란에 가담하는 훈장들이 나오기도 했다.

“천하의 책이 모두 내 책이요, 이 세상에서 책을 아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다.”

구한말 장지연이 엮은 ‘일사유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 후기 책쾌(冊쾌), 즉 서적 중개상으로 활약했던 조생이 한 말이다. 15세기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책쾌는 금서나 불온서적을 유통시켜 실록에 등장할 정도로 떠들썩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세책업자나 작자, 필사자에게 독자 반응을 전하는 정보원 노릇을 해 각종 서적 및 소설의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시나 산문에 책쾌가 집을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데서 이들이 상층 독서문화의 에디터로서 장서 문화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책쾌들이 희귀 서적을 밀반입하는 주요 통로가 바로 역관들이었다. 역관은 주로 통역을 담당하는 정부 기관인 사역원에서 배출됐다. 생도들은 보통 15세 이하의 나이에 사역원에 들어가 3년간 한어, 몽골어, 일본어, 여진어를 배웠다. 이들은 외국어 능력은 물론이고 사서오경 시험에도 통과해야 비로소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역관은 사대부들에게 ‘작은 기예’를 지녔다고 홀대받았지만 그 대신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외국으로 사신단을 수행할 경우 개인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과 문화 도입에도 적극적이어서 조선 후기에는 홍세태, 이언진, 정지윤, 이상적 등 역관 문인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개화기에서 한말 무렵에는 중인 집단 중 가장 많은 관료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 책은 종류만 22가지에 달했던 집 짓는 장인, 남대문시장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100년 전 금융업자인 일수쟁이들, 왕을 대신해 하늘을 읽고 역서를 만들었던 천문역산가 등 직업 12가지를 다룬다.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자 조선의 실상과 변화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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