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파월장병 첫 귀환

  • 입력 2005년 12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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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였다. 당시 필리핀이 129달러였으니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이 간다. 1964년 7월 정부는 북한과 중국의 안보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한다. 나라예산까지 지원해 주고 있었던 미국과의 연대라는 확실한 명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먹고사는 일이 급했다.

‘혁명이 나던 1960년도 민주당 정권의 추가 경정예산 6088억 환 중 외국 원조금액이 3169억 환으로 52%다. 나라예산마저 절반을 넘도록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된 국가이면서도 통계상으로 보는 한국의 실가치는 48%에 불과한 것이었다.’(박정희 전 대통령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중)

박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이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상품을 국제시장으로 무한히 진출케 하고 자본과 기술을 국제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파병과 한일 국교정상화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한국 경제에 베트남 특수는 단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선 현금 수입이 쏠쏠했다. 참전한 국군 장병들이 9년 동안(1965∼73년) 미국으로부터 받은 해외 근무 수당은 모두 2억3556만8400달러로,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800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한국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 및 용역 사업이라는 전쟁특수를 누렸다.

참전 기간 중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지원은 괄목할 만했다. 6개항의 경협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 우방 각국으로부터 상업차관이 들어왔고 대미 수출도 급증해 1968년엔 한국의 대외 교역량의 52%에 이르렀다.

1964년 군의관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으로 시작된 파병은 1965년 청룡부대, 맹호부대, 1966년 백마부대가 감으로써 총 4만5000여 명에 달했다. 남한 인구의 622분의 1이었다. 당시 미군은 31만 명이었는데, 이 역시 우연의 일치인지 미 전체 인구의 622분의 1이었다.

파병 7년 만인 1971년 12월 9일 국군 첫 철수 부대가 부산항에 도착한다. ‘베트남으로 갔던 수많은 김 상사’들이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첫날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는 그 시절 ‘따이한’들이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흘린 피와 바꾼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숙연해진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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