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제 오류-난도 조절 실패 거듭돼 온 수능
학교수업 연계-고급역량 측정 전환 필요해
대학에 점수-순위 제공, 선별 활용 맡기고
단계적-참여형 개편으로 공정성 확보해야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
1934년 조선총독부는 입시 부담을 줄이겠다며 ‘입시 과목 축소’와 ‘응용문제 출제 금지’ 정책을 내놓았다. 과도한 경쟁과 수험생·학부모 고통 등의 원인을 시험 제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육정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 입시를 둘러싼 논쟁은 반복돼 왔지만,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부는 1993년 암기 중심의 학력고사 체제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사고력 향상을 목표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도입했다. 그러나 출제 오류와 난이도 조절 실패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역대 기관장 12명 중 9명이 중도 사퇴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수능 응시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학교 수업만 충실히 따라가도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능이 쉬워질수록 걱정은 커진다. 상위권 대학, 특히 경쟁이 치열한 전공일수록 대학별 고사나 추가 전형 요소를 도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공정성이다. 학교와 교사마다 평가 기준과 역량이 다른 현실에서 내신 성적만으로 학생의 실력을 전국 단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수능과 같은 전국 단위의 공통 평가 체제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수능은 어떻게 개선돼야 할까. 수능 준비가 대학 입학을 넘어, 대학 공부와 직업 생활,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고급 역량을 측정하는 논술형 문항이나 풀이 과정을 평가하는 수학 문제 출제도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준비다. 학교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가진 뒤, 이런 문항을 단계적으로 병행 출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처럼 하루에 모든 시험을 끝내면 좋겠지만, 고급 역량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하루로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핀란드 등 주요국은 대학 입학자격 시험을 수일에 걸쳐 치른다. 학생들이 젊음을 바쳐 준비한 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필요도 있겠다.
이제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의 소모적 논쟁보다는 수험생에게 부여된 점수, 전체 응시자 대비 순위를 대학에 제공하고, 그 활용은 대학에 맡기면 된다. 1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운의 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로 공정한 평가의 출발점이다.
출제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출제위원들은 선별보다는 고급 역량을 얼마나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영어권 국가에서 보기에도 비정상적으로 출제되는 어려운 영어 문항, 글로벌 수학 학계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난도가 높다는 수학 문제가 왜 수능 시험에 출제돼야 하는지 출제기관은 충분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국내 출제자들끼리 난이도 조절이 어렵다면, 차라리 해외 전문 학계에 출제(검토)를 의뢰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수능과 대입 제도가 설계되면, 학생과 학부모는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제도를 활용하고 그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설계상의 오류로 발생한 문제를, 제도에 적응하려 애쓴 학생과 학부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대학은 전공 분야별로 요구하는 수능 점수 기준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전공별로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되는 과목은 무엇인지, 해당 전공을 공부하는 데 특히 중요한 과목에는 어떤 방식으로 가산점을 부여할 것인지가 수험생이 보아도 합당하게 설명된다면, 우리는 그 기준에 맞춰 준비할 것이다. 아울러 지역과 가정 환경 등 다양한 이유로 충분한 교육적 지원을 받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사회통합전형의 비율은,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준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공정한 경쟁은 동일한 출발선이 보장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대입 제도의 내용만큼이나, 그 결정을 내리는 절차와 참여자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수능 시스템과 대입 제도를 직접 설계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그 논의가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절차와 참여 구조를 정하고 관리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1년 이상에 걸친 국민 대토론회도 검토할 만하다. 정치 이념이나 특정 교육 철학을 앞세워 여론을 몰아가선 안 된다. 국내외 전문가뿐 아니라 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개인에게 문을 열고, 우리 사회의 특성에 부합하는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학교 교육을 통해 실력을 갖춘 이들이, 훗날 자신이 거둔 성과를 독점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과 더 많이 나누는 ‘신(新)능력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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