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백형찬]국악이 신음하고 있다

  • 입력 2005년 9월 27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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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악을 전공하는 교수의 연주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나에게 산조를 알게 한 또 한 분의 스승’이라는 비교적 긴 제목을 단 연주회였다. 20여 년 전 자신에게 거문고 산조를 처음으로 가르쳐 준 스승을 그리워하며 연 음악회였다.

그 교수는 나이 오십을 훨씬 넘긴 이였다. 초청장에는 화환과 축의금을 사절한다며 그 대신 ‘후원회 회원으로 가입해 달라’는 말과 함께 은행계좌번호가 적힌 작은 메모지가 담겨 있었다. 그 후원회는 돌아가신 스승의 부인이 홀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어 이를 도와 드리고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만든 모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연주회를 연 것이다.

연주회장은 매우 좁았다. 자리는 만석이었다. 대개 국악 연주회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기 마련이다. 이날 연주회는 그렇지 않았다. 백발의 노인부터 교복을 입은 젊은 학생까지 가득 차 있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스승이 생전에 연주하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짤막히 보여 주었다. 스승의 영상 거문고 산조가 끝나자마자 교수는 그 곡을 그대로 이어받아 같은 가락으로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천천히 진양조로 시작한 곡은 중모리와 중중모리를 거치면서 마지막 자진모리에 다다르자 무척 힘겨워 보였다. 거의 1시간 동안 혼자 연주한 데다 스승의 산조를 그대로 재현해 보이려고 손가락에 골무도 끼지 않은 채 거문고 줄을 눌렀기에 마비가 온 것이다.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어잇! 어잇!’ 하는 추임새가 들리기 시작했다. 동료 국악인들이 교수에게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내는 소리였다. 이에 교수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자진모리까지 연주를 마쳤다. 곡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힘찬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실내에 불이 환히 켜졌다. 객석에는 그 스승의 부인이 앉아 계셨다. 처음부터 연주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는 부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손의 마비 때문에 서른일곱 군데나 틀렸고, 스승의 산조는 흉내조차 못 냈다”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음악회였다. 돌아가신 스승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 홀로 남은 스승의 부인께 그대로 바쳐진 음악회였다. 그 교수에게 산조를 가르쳐 준 스승은 거문고의 명인 한갑득 선생이다. 조선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 명인과 그의 제자인 박석기 명인의 맥을 잇는 분이다. 부인은 국악의 명창 박보아 선생이시다. 명창 임방울 선생 장례식에서 상엿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 메겨 장례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든 분이다.

국악인들의 삶은 이렇게 늘 어렵다. 민족의 음악을 지켜 온 가난한 국악인들을 국악인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안 된다. 문화 선진국들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예술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로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예술가들이 최저 임금을 보장받으며 창작활동을 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예술가들도 일반 직장인들과 똑같이 실업보험, 의료보험, 사망보험을 받을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사회는 국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문화관광부는 국악 진흥 방안뿐만 아니라 원로 국악인에 대한 지원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 또 민간기구로 새롭게 출범한 문화예술위원회도 국악 지원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기업도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서양음악에 국한하고 있어 국악에 대한 지원은 소홀한 편이다. ‘국악 살리기’에 정부와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악의 명줄은 조만간 끊어질지 모른다.

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교육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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