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왈릴리 고양이 나무’…영혼 울리는 맑고 슬픈 사랑

  • 입력 2005년 9월 24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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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씨는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든 시대든, 사물이든 관념이든. 내 소설 속의 사람들은 사랑할 자격을 지녔다. 나는 그들을 넘겨다보며 부러워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사진 제공 민음사
조용호 씨는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든 시대든, 사물이든 관념이든. 내 소설 속의 사람들은 사랑할 자격을 지녔다. 나는 그들을 넘겨다보며 부러워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사진 제공 민음사
◇ 왈릴리 고양이 나무/조용호 지음/276쪽·9000원·민음사

왈릴리는 아프리카 서북쪽의 나라 모로코에서 로마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과연 고양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가 있을까? 모로코를 여행하던 한국인 사진작가에게 가이드로 나타난 교포 여성은 말수가 적다. 이곳에서 한국인 남자를 알게 됐고 결혼도 했지만 그가 숨지자 남편이 묻힌 나라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 여자다. 그녀는 갈 곳 없는 거리의 고양이들을 거둬들이는데 나중에는 스물, 서른 마리가 넘어도 기꺼이 자기 잠자리를 내준다.

이 작품집의 타이틀 소설에 담긴 이야기다. 작가 조용호(44) 씨가 두 번째로 펴낸 작품집인 이 책에는 모두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이 작품집의 세계를 사람에 비유해 보라면 어떤 인물이 될까? 맑고 슬픈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는 카페의 가객(歌客)이 될 것 같다. 그 노래들은 레퍼토리가 다양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가객은 하나의 집착을 갖고 있다. 한번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 준 옛사랑은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는 집착, 설령 잊을 수밖에 없어도 가장 늦게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집착이다.

이 작품집에서 울림이 가장 큰 소설인 ‘베르겐 항구’는 세상의 낙오자가 된 옛사랑을 다시 받아들인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가 두 아이를 낳고 때늦은 행복의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폐선암(폐암의 일종) 통보를 받자 마지막으로 찾는 이는 그녀의 대학 남자후배다. 이 후배는 그녀에게 흠모와 존경의 어느 경계에 자리한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코에 플라스틱 관을 끼운 채 힘겹게 호흡하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빨리 나아서 퇴원하면 우리 은밀하게 만나는 거야. 남들 다 하는 불륜이라는 거, 우리도 한번 해 보지 뭐.” 그게 전부다. 북유럽의 짧은 해가 하얀 설산 위에 빛났다가 사라지는 노르웨이의 피오르 물길을 따라 취재 여행에 나선 후배의 머릿속에는 어떤 아름다운 풍경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상의 곳곳을 여행하는 조용호 소설의 가객은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지는 밤하늘의 비행 공로(空路)를 날아가기도 한다. 소설 ‘별의 궁륭’의 내레이터는 여객기의 부기장이다. 그 역시 희생적이었던 한 여인과의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한 아픔을 안고 하늘 길을 하염없이 날아간다. 저 아래 적란운에서 번득이는 뇌우들의 소리가 다 지나가고, 결코 닿지 못할 별자리들에서 날아온 유성들만이, 그 짧은 순간의 조우들만이 그의 시야를 잠시 밝혔다가 사라진다. 그 별똥별들은 이 작품집의 가객이 옮겨 다녔던 모로코의 모래언덕과 베르겐의 기차역, 시베리아의 얼음 벌판, 서해 바다의 덕적도 어딘가를 찾아가 묻힐 것이다. 그러나 그 별똥별을 기억하고, 노래하는 이들이 남아 있는 동안 그것들이 내뿜었던 광채들은 죽는 게 아니지 않겠는가.

‘왈릴리 고양이 나무’의 사진작가는 형해만 남은 로마의 유적을 쳐다보며 한국인 여인에게 말한다. “우리도 천년쯤 뒤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요?” 고양이들을 열매처럼 매달고 잠들곤 했던 그 여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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