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국내전시회 연 재일교포 2세 화가 곽덕준씨

입력 2003-06-17 18:32수정 2009-10-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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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차림에 삭발한 작가 곽덕준(郭德俊)은 예순 여덟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童顔)이었다. ‘감사합니다’ 말고는 한국 말을 전혀 못하는 재일 교포 2세인 그는 식민지 청년으로 태어난 열등감과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병마(病魔)를 이겨내고 세계 화단에서 확고한 자기 입지를 구축한 한국 작가다.

전시기간 중 만난 그는 무거움 대신, 시종일관 여유와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 해학과 풍자,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 그대로였다.

그는 교토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그의 가족은 귀국하지 못했고 전후 일본 사회는 식민지 소년을 품어줄 아량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나라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려야 했다. 이십대에 한쪽 폐를 잃는 폐결핵에서 극적으로 소생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울적한 숙명을 예술로 표현하기로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곽씨의 기념전에서는 고독하고 쓸쓸했으나 이를 치열한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한 남자의 열정과 만날 수 있다. 회화는 물론, 사진, 오브제, 퍼포먼스 등 각 분야에 두루 걸친 90여점의 작품들은 세상의 무의미와 헛됨을 화두로 삼았지만, 역설적으로 삶을 성찰하게 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나는 추상화 시리즈는 1960년대 초기 작품들인 ‘위선자 시리즈’이다.석고와 호분을 섞어 화면의 질감을 표현하고 목공용 본드로 마무리하는 기법을 써 유화와는 다른 독특한 질감을 보여준다.

1969년부터 곽씨는 평면을 버리고 이벤트, 비디오, 사진 작업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는 자, 지도, 계량기 같은 신뢰의 상징인 오브제를 통해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어 버리는 인간의 시각과 의식의 모호함에 주목했다. 실재를 뒤집었을 때 나타나는 허구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미술관 야외 조각장에 설치된 ‘10개의 계량기’. 10개의 저울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이 작품은 ‘계량하는 것이 계량되고 있다’는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측정과 계측’의 무의미함과 복제된 정보의 허구성을 꼬집는다.

전시장 안쪽에 있는 ‘대통령과 곽’ 사진시리즈도 마찬가지다. 1974년부터 시작한 이 작품은 케네디, 부시, 클린턴 등 ‘타임’지에 등장한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거울로 반쯤 가리고 아래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찍은 연작사진이다. 얼핏 정치적 풍자 같지만 작가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인쇄된 허구라는 사실을 일깨우려 한 것”이라 말한다.

만화적 기법을 도입한 회화 시리즈인 ‘무의미’도 눈길을 끈다. 수십 개의 화면 속 무의미한 기호들 위로 코트 깃을 세우고 가는 우스꽝스러운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냉소적 표정이면서도 끊임없이 곁눈질을 한다. 모든 것을 냉소하면서도, 그렇다고 외면도 못하는 작가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런 섬뜩한 자각은 비디오 작품인 ‘자화상’에서 정점에 이른다. 유리판에 얼굴을 눌러 일그러진 모습이 나오는 화면을 볼 때 처음엔 웃지만 나중엔 저토록 집요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삶이 족쇄처럼 느껴져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의 얼굴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1978년 일본 미술계는 ‘근대 일본의 자화상 : 자신을 응시하는 81인전’에 이 작품을 선정해, 비로소 그를 작가로 인정했다. 그로 하여금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해준 첫 작품인 셈이다.

강수정 학예연구사는 “그의 유머러스하고 독특한 화면을 보면 얼핏 친근감과 재미를 느끼지만, 조금더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읽힐 것 같으면서도 읽히지 않는 불편함에 부딪히게 된다”며 “작품 하나하나에는 인간과 인간, 개인과 사회의 단절과 미묘하고 숙명적인 거리를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어법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작가의 진솔한 고민이 담겨있다”고 소개했다. 해학과 유머 속에서도 삶의 무거움을 느끼게 하는 그의 전시는 8월 31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열린다.02-2188-600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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