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관 역사를 지킨다 2]조선 언관의 사표 김제신

  • 입력 2001년 4월 4일 18시 49분


조선 초기 언관들의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언관제도가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성종 대에 이르면 언관들의 탄핵활동이 확대되기 시작해 아무리 높은 관료라 해도 언관들의 탄핵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고위 관료들은 권력자 들이었기에 이들의 비리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성종 때 사헌부의 장령(掌令·정4품)으로 언관이었던 김제신(1438∼1499)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제신은 1462년(세조 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이후 1499년 전주 부윤으로 봉직하다 죽을때까지 비교적 순탄하고 평범한 관료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성종초 그가 언관이 되었을 때 보여 주었던 활동은 조선조 언관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글 싣는 순서▼
1. 조선 성리학의 순교자 조광조
2. 조선 언관의 사표 김제신
3. 조선 지조의 상징 성삼문
4. 유교이념의 파수꾼 김일손
5. 直言 모범보인 황희

그는 1477년(성종8년) 5월 사헌부의 지평(持平·정5품)이 되었으며, 다시 5개월 후인 10월 사헌부의 장령(정4품)이 되었다. 장령에 임명된 바로 다음 날, 양성지(梁誠之)를 탄핵하면서 그는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같은 해 10월 4일 양성지가 언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된데 대해 김제신은 “이조판서 재임시 많은 뇌물을 받았던 탐욕한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언관의 수장이 될 수 없다고 탄핵을 제기했다.

그는 양성지의 부정을 일일이 열거한 다음 “제가 양성지가 한 짓을 비록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입에 퍼진 소문이 이와 같으니, 양성지가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다른 부정한 무리들을 탄핵해 그 잘못을 들추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라면서 “하루 빨리 양성지를 파면시켜 언관의 기강을 떨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조 때부터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양성지는 성종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원로 대신이었다. 왕은 김제신에게 양성지가 이조판서 재임시 부정했다는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밝히라고 명했다. 그러나 김제신은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들끓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언관의 수장이 돼서는 안된다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문제는 조정 전체의 큰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대신들이 뜬소문을 가지고 원로대신을 탄핵한다면 국가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면서 사실을 끝까지 추궁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언관의 활동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고위 대신들에 대한 비위사실의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누가 그런 정보를 제공하겠는가라고 되물으면서 김제신을 옹호했다.

이처럼 사건이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양성지는 남에게 전해들은 말만 가지고 자신을 탄핵했다면,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밝혀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상소를 제기했다.

이에 성종은 양성지가 이조판서로 재임하던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의 사초(史草)를 비롯한 어떠한 기록에도 그가 부정했다는 말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일부에서는 양성지에게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임이 드러났으니 그의 명예는 회복된 것이며, 언관은 세상에 돌아다니는 말이라도 문제삼을 수 있으니 김제신도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는 절충론이 제기되었다.

성종도 이 사건을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해 양성지의 체면도 살려주고 김제신이라는 언관의 활동도 억제하지 않는 해결책을 원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양성지가 워낙 거세게 항의를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넘어갈 수도 없었다.

성종은 김제신을 불러 직접 사실을 캐물었다. 그러나 김제신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들은 소문의 진원지를 밝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으나, 양성지는 결국 대사헌에 임명되지 못했으며 김제신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김제신은 언관으로서 언관의 수장에 임명된 양성지를 탄핵했으니 이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불명예를 지닌 인물이 왕조의 도덕적 파수꾼을 이끄는 수장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으며,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위 대신들을 탄핵할 수 없다면 언관 활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풍문에 의거해 탄핵을 제기한 것이었다.

고위 인사들의 부정 행위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구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 해도 뒷날의 보복이 두려워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김제신은 그런 의미에서 풍문에 따라서라도 이처럼 고위 관료들의 비행을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언관이 구체적 증거도 없이 풍문에 의거해 정부의 주요 대신들을 탄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들 사이에 그러한 공론(公論)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공론은 나쁜 풍문만으로도 고위 관료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선비의 정결한 몸가짐을 강조한 것이었다.

정두희(서강대 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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