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내고향의 봄 -이문열

  • 입력 2001년 4월 2일 18시 55분


◇이 봄에 띄우는 귀거래사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고향은 사어(死語)와 다름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간혹 대중매체에서 한물간 유행처럼 그 말을 쓰기는 하지만 뜻은 이미 옛것과 같지 않다. 전통, 혈연, 추억 같이 시간과 연관된 것들은 지워지고 지리와 관광, 특산 같은 공간적인 의미만이 살아있다. 실은 내 젊은 날에도 그랬다.

그런데 재작년 가을 생각보다 일찍 고향에다 강마(講磨)와 연거(燕居)를 겸할 수 있는 집 한 채를 짓게 되면서 고향은 다시 그 온전한 뜻을 회복했다. 향리(鄕里)의 적지 않은 재정지원에다 생가(生家)를 끝내 되찾지 못한 내 부끄러움이 부추긴 탓인지 집은 뜻밖으로 규모가 커져 이제야 겨우 마무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짓는 동안의 잦은 들락거림이 끊임없이 고향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준 덕분이었다.

생각컨대 사람의 한 살이(생·生)는 그 출발점을 시작으로 하는 원(圓)운동이고 고향은 바로 그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지난 세밑 안채 도배가 끝났다 하여 미리 묵어보았던 하룻밤이 떠오른다. 거의 반세기만에 다시 세운 고향집에서 잠이 든다는 뿌듯함도 잠시, 나는 까닭 모를 허망감으로 긴 밤을 뒤채었다. 내가 겨드랑이의 털이 떨어지고 넓적다리의 살이 빠지도록 세상을 뛰어 다닌 것은 어쩌면 이 돌아옴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밤 나를 사로잡은 허망감은 아마도 그런 귀향(歸鄕)을 원운동의 닫힘 또는 한살이의 마침으로 보는 세상의 통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는 그 만년의 대작(大作)에서 돌아왔다 다시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오디세우스를 수만 행(行)의 방대한 서사시로 노래하고 있다. 되찾은 왕국의 영광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도 고난으로 굳세고 드높아진 정신을 가두어둘 수는 없었다.

설령 사람의 한살이가 고향을 출발점으로 하는 원운동이라 할지라도, 그 원이 한 사람에게 꼭 하나이어야 할 까닭은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삶의 닫힘도 마침도 아니며, 갇힘이 되어서는 더욱 안된다. 고향은 또 다른 원운동의 출발점, 언제나 새로운 출발로 열려있는 포구일 수도 있다.

따라서 고향에 돌아가는데 너무 이른 법은 없고, 나도 이제 더는 망설임 없이 돌아가려 한다. 이번의 한 바퀴 원운동은 이만 마감할 때가 되었다. 한번 고향을 떠나온 뒤 나의 삶은 어떠하였던가. 돌이켜 보면 그러잖아도 자옥한 세상 티끌에 내 티끌을 보태었고, 엉머구리 끓듯 하는 저자거리의 소란에 내 소란을 더했을 뿐인 서른 해였다.

창밖에는 봄이 완연하다. 뒤란 산수유는 이미 활짝 피었고 뜰 앞 매화도 벙글었다. 내 이제 머지않아 얕은 배움과 비루하고 속된 성품에서 비롯된 죄를 세상에 자복(自服)하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너그러운 처분을 빌려고 하거니와, 돌아갈 고향에 봄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인지.

등성이들은 옛날처럼 참꽃 개꽃(철쭉)으로 화안하고 골짜기도 그때같이 복사꽃 돌배꽃 흐드러지게 필 것인지. 개울들은 봄눈 녹은 물로 다시 맑고 깊으며, 먹치(갈겨니) 가살치(쉬리)떼 그 물살 거슬러 오를는지. 낯선 내음 섞인 봄바람 그대로 불어와 산너머 가보지 못한 곳을 그리워하게 하고, 그 뭉게구름 그대로 일어 이를 수 없는 곳을 오히려 더 애타게 우러를 수 있게 해줄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꿈 그대로 늙지 않고 자라나 때가 오면 허옇게 센 머리로도 다시 닻올릴 수 있게 해줄는지.

이문열(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