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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31일 20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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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을 꿈꾸던 배는 묶인 채 잠들었고
어디서 오고 있는 걸까 푸른 파도의 꿈은
썰물진 자리마다 밤별이 내려와서
저렇듯 반짝이는 갯벌의 숨소리
그 세월 언덕 너머로 걸어오는 안개여
오늘도 구멍난 生의 그물을 깁는 아버지
그 어깨 위로 추억처럼 水仁線이 지나가고
우리네 고단한 삶도 협궤열차처럼 녹슬었다.
▼당선소감/손정아▼
뜻밖의 당선 소식을 듣고 너무 부끄러워 어디론가 멀리 숨어버리고 싶었다.
놀람과 동시에 안겨지는 새 천년의 희망이 눈처럼 소복이 쌓이고, 그 순간 절단된 내 유년의 꿈들이 펼쳐졌다.
교통사고로 열네 살에 접어야 했던 발레리나의 꿈, 정신병자로 취급받았던 그림그리기, 내 의사와 무관하게 계획되었던 진로…. 꿈꿀 자유와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한 내 유년의 삶은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이 상처들이 결국은 나를 참 자유를 향한 뒤늦은 공부와 문학의 길로 내몰게 한 것 같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당했던 또 한번의 시련은 절망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했으며, 나는 그해 겨울, 함께 해고된 동료와 소래를 찾았다.
제 구실을 상실한 포구를 바라보며 우린 묵묵히 녹슨 철로를 걸었고, 할 말을 가로막고 우리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세상에 대해 무언의 반항을 꿈꾸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안개 속을 걸어 희미하게 전해지는 파도의 꿈이 있었다. 순간, 나는 한쪽으로만 삐딱하게 길들여진 내 삶의 옷을 새로이 갈아입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았던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아낌없는 지도로 새 삶의 등불을 밝혀주신 박시교, 한광구 선생님을 비롯한 추계의 은사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에 앞서 젊은 날부터 내 삶의 언저리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토닥여주신 강형철, 김양호 선생님과 숭의의 은사님께 큰 절 올리며, 고향과 함께 항상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기철 선생님, 그동안 소홀했던 부모님과 가족에게 이 큰 기쁨 돌리며 고마운 마음 전한다.
갑자기, 운문사 절에서 만나 내 유년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던 재동 오빠와 수화로 말하던 동생 영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족처럼 사랑했던 두사람에게 십 년의 세월을 넘어 이제야 안부 전한다. 참 보고 싶다.
△본명 손정순 △70년 경북 청도 출생 △91년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조 심사평/유재영▼
금년도 응모작품들은 예년과 달리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그 중 하나는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비록 문제가 있었지만 사설시조의 투고량이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형화된 시조 형식에서 벗어나 시적 성취에 좀더 무게중심을 두고자 한 형태적 변모 양상이다. 사설시조의 증가 추세는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과 함께 단조로운 평시조의리듬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형식의변형은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당선을 놓고 겨룬 작품은 ‘양수리에서’ ‘판화작업 3’ ‘겨울폭포 1’ ‘강에서’ ‘한 개의 달걀을 위한 명상’ ‘정양사망금강전도’ ‘그 해 겨울 소래에서’ ‘예밀리 시편’ 등 8편. 여기서 다시 마지막 3편으로 압축되었다.
‘양수리에서’의 경우 셋째 수의 중 종장 처리 미숙이 지적되었고 사설시조인 ‘판화작업 3’은 탄탄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종장을 너무 쉽게 처리한 것이 흠이 되었다. 이에 반해 ‘그 해 겨울 소래에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와 주제를 이끌고 나가는 힘이 뛰어나 신인으로서의 그 가능성이 기대되었다. 특히 이 작품에 나타난 서정 및 자연과 삶의 진솔한 모습들은 우리 시대 시인들이 지녀야 할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새 세기를 열어갈 새로운 정형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대성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