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임수]신용사회 뒤흔드는 ‘금융 계급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3일 23시 15분


정임수 논설위원
정임수 논설위원
한국은행이 만든 어린이 경제교육 동영상을 보면 ‘신용’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신용이 나쁜 사람으로 분류되면 돈이 필요해지더라도 은행에서 대출받기가 어렵고, 다행히 대출을 받더라도 신용이 좋은 사람보다 이자를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신용이 재산이에요.” 신용도가 낮을수록 높은 금리를 부담해야 한다는 건 초등학생도 반드시 알아야 한 금융의 ABC라는 얘기다.

대통령 한마디에 이자 덜 내는 저신용자


그런데 요즘 은행권에선 이를 거슬러 저신용자가 고신용자보다 더 낮은 금리를 적용받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연 15%대인 서민 대출 금리를 두고 “너무 잔인하다”며 “초우량 고객에게 0.1%만이라도 부담을 더 지워 어려운 사람에게 싸게 빌려주면 안 되냐”라고 주문하면서다. 이에 발맞춰 은행들이 정책금융 상품을 중심으로 금리를 조정하면서 저신용자 대출 금리는 한 달 새 1%포인트 넘게 떨어졌다. 대출 총량 규제에 막혀 고신용자 금리는 꿈쩍하지 않는 것과 딴판이다. 대출을 제때 갚고 각종 공과금과 카드값을 연체하지 않으며 신용 관리를 해온 이들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 같은 비상식적인 ‘금리 역전’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게 뻔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에도 “현재 금융 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금융 계급제’가 됐다”며 질타를 이어갔다. 기존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해결책도 강조했다. 억지로 금리를 낮추고 빚을 탕감해서라도 취약계층을 지원하라는 뜻이다. 5대 금융그룹은 이를 위한 포용금융에 5년간 70조 원가량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저신용자이며 ‘약탈적 금리’의 피해자가 된다는 금융 계급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신용도는 소득보다 금융 거래 실적, 연체 이력, 대출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평가한다. 성실히 경제 활동을 해온 저소득층 중에 고신용자가 많다.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실에 따르면 소득 상위 30% 가운데 고신용자는 674만 명이지만, 소득 하위 30%이면서 고신용인 사람도 202만 명이나 된다. 오히려 신용점수 664점 이하 저신용자만 보면 고소득자가 저소득자보다 9만 명 많다. 이를 무시한 채 계급제를 내세워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신용 갈라치기’를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포용금융 필요하지만 경제 원칙 훼손 안 돼

빚 수렁에 허덕이는 취약계층의 고통을 덜어주고 이들의 경제 활동을 돕는 건 필요한 일이다. 은행들이 손쉬운 이자 장사로 배를 불린 것도 사실이고,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포용금융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 역시 옳다. 그렇다고 금융의 기본 원칙과 신용 체계까지 허물어서는 안 된다.

선의로 포장했지만 시장 원리에 역행하는 정책들이 경제를 왜곡하고 되레 서민들을 옭죈 사례를 수없이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취약계층의 고금리 부담을 줄이겠다며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인하하자 대부업체들이 영업을 중단하면서 수십만 명이 불법 사채시장으로 내몰렸다. 이 대통령이 경기지사 시절 도입했던 연 금리 1%대의 극저신용자 대출은 현재 연체율이 30%대 후반을 넘어섰고, 대출받은 사람 열 중 셋은 연락두절 상태라고 한다. 금융을 복지로 착각한 정책의 참담한 실패다.

계급제를 앞세운 신(新)관치로 기형적인 금리 왜곡이 계속되면 시장은 혼란에 빠지고 금융 부실은 불어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실물경제로 전이돼 사회 전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은행 돈을 빌리기 힘든 서민이라면 신용사회의 근간을 흔들며 인위적으로 금리를 낮춰 주기보다 재정 투입을 통한 복지와 일자리 정책이 먼저가 돼야 한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이들에게 ‘금리 덤터기’를 씌우며 차별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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