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엘리트는 왜 이 모양인가[동아광장/최인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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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돈의 그림자에 비치는 법조인들
대장동 사건은 가난 탈출 아닌 욕망의 거래
선진국 엘리트에 걸맞은 자아실현 어려운가
성찰 없다면 얼굴만 바꿔 계속 나타날 것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화천대유, 천화동인…. 주역의 괘에서 유래한 좋은 뜻이라 하나 실상이 드러날수록 뜻은 어디 가고 검은돈의 그림자가 자꾸 튀어나온다. 아직 초기 단계라 전모가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사니 특검이니 하는 무서운 말들이 오가는 걸로 봐서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대리의 퇴직금 50억 원은 웬 말이고 한 분도 모시기 어려운 전직 대법관과 검찰총장, 특검이 두루 같은 회사의 법률자문을 맡은 이유는 또 무엇인가?

20년 전쯤엔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가 전국을 강타했다. 올해는 ‘화천대유 하세요’가 추석 인사말로 등장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다. 다들 대단히 심란하고 화가 나며 시니컬하다 못해 좌절 모드다. 나 역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가 만약 꽤나 영향력 있는 법조인으로 ‘그런 제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했을까? 물리치기 쉽지 않은 이익에 눈 질끈 감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됐을까, 아니면 단칼에 거절했을까. 아마도 ‘노’ 라고 했을 것 같지만 사람의 일은 장담하는 게 아니니 더 이상의 상상은 접는다. 물론 당장 생계가 막막한 가난한 이에게도 늘 엄정하게 바른 선택을 요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처럼 몇 억, 몇 십억 원씩 주고받은 돈은 가난에서 탈출하는 데 필요한 돈이 아니다. 지금도 너무나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의 욕심이 거래된 돈이다. 더 큰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의 거래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 욕구 5단계 설을 말했다. 인간의 욕구는 몇 가지 단계를 형성한다는 동기 이론인데 그는 이를 피라미드로 표현했다.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가 나타나며 먼저 요구되는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의 욕구로 나아간다는 설명이다. 그가 말한 다섯 가지 욕구란 맨 아래 단계에서부터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특히 제일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란 계속 발전하기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인데 다른 욕구와 달리 욕구가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나는 이번 대장동 사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 관련 회사의 법률자문을 맡았다는 법조인들에게 특히 눈이 갔는데, 한 사람씩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그들을 움직인 욕구는 위의 다섯 가지 중 무엇일지 궁금해지는 거였다. 법조계의 최고 영예까지 누린 이들이니 적어도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애정과 소속의 욕구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혹시 존중받고 싶은 욕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자아실현 욕구였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이다. 만약 지방의 작은 마을 출신이라면 법과대학에 합격했을 때, 또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들이 나고 자란 동네엔 플래카드가 붙었을 거다. 누구네 집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고,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우리 동네 경사라고. 그런데 왜 이들은 동네의 자랑을 넘어 국민의 자랑은 되지 못하는 걸까. 우리 사회가 키워낸 엘리트들은 왜 이런 걸까.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라는 엄청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지조를 지키며 평생 가난하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가진 것을 다른 이에게 다 나눠 주라는 것도 아니다.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 사회의 엘리트에 걸맞은 욕구를 가져달라는 주문이다.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으라는, 당당하지 못한 돈 대신 자아실현에 힘써 달라는 상식적인 요청이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는 다른 욕구와 달리 욕구가 충족되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증대된다고 하니 이왕이면 끝없는 돈 욕심 대신 단계를 높여 자아실현 욕구를 추구해 달라고 제안하는 거다. 그럼 많은 국민들의 자랑스러운 롤 모델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진공 속에서 살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숨쉬고 영향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매일같이 숨쉬는 공기가 그런 존재들을 만들어 낸 거라면 이쯤에서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쫓을지,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아있을 때 추구할 것은 무엇인지 정말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이들은 다음에도 얼굴을 바꿔 계속 나타날 것이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엘리트#대장동 사건#화천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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