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야기를 아들들에게 글로 전한 사람은 유배 중인 다산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 즉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마흔에 시작된 고난은 쉰일곱이 되어서야 끝났다. 억울하고 절망스러운 삶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고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서글픔이 묻어나는 시를 쓰지 않으려 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그는 밤 한 톨을 잃고 우는 아이가 되지 않으려 했던 고전주의자였다. 유배 중에 구슬픈 시를 많이 썼던 당나라 시인 유자후(柳子厚)를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도 그래서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유자후는 유배를 당했을 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우울하고 슬픈 글을 많이 쓴 문장가였다. 다산은 그게 싫었다.
다산이라고 어찌 괴로움이나 절망이 없었을까. 차고 넘치는 게 괴로움이요 절망이었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18년을 사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불행과 시련을 넓고 크게 보려고 했다. 그러한 거시적 안목이 있었기에 역사에 남는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쓰고 또 썼다. 실학자인 그에게 치유는 개인적인 감정의 토로나 분출이 아니라 다수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또 쓰는 데 있었다.
나경원, 진중권 만났다…“공격받을 때 편 들어줘 고맙다”
김어준은 어쩌다 ‘구라쟁이’가 됐나
- [사설]감사원장은 정권의 忠犬 노릇 하라는 식의 임종석 발언
하태경 “윤건영, 김여정 감싸기 엽기적 상상력에 헛웃음”
조국 딸 국시 합격설에 의사단체회장 “무자격자가 의사, 내면허 찢고 싶다”
김종인은 왜 ‘루비오 보고서’를 돌렸나
Copyright by dongA.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