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중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의 한 병실. 붕대를 칭칭 두른 아들의 두 다리를 하염없이 어루만지던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속울음을 삼켰다. “괜찮다. 걱정 마시라”는 아들의 위로에도 흐느낌과 한숨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들의 만신창이 다리를 애처롭게 쓰다듬는 그녀의 주름 잡힌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해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서 적 포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고, 왼쪽 다리 무릎 아래도 크게 다친 이희완 해군 중위(현재 중령)를 인터뷰하는 내내 애끊는 모정이 절절히 다가왔다.
이 중위와 함께 북한 경비정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윤영하 소령 등 희생 장병의 유족들이 감내할 고통의 깊이도 절감했다. 당시 목숨과 영해 수호를 맞바꾼 장병과 그 유족에게 돌아온 것은 냉담과 무관심이었다. 군 통수권자를 비롯해 국방부 장관 등 군 지휘부조차 영결식장을 찾지 않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사수한 영웅들의 희생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와 햇볕정책의 그늘에 가려지고 묻혔다. 북한으로부터 변변한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은 전사상자 가족에게 평생을 안고 갈 생채기를 남겼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회한을 갖고 사는 국민들은 또 있다. 8년 전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과 연평도 포격 도발(2010년 11월 23일)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형제를 비명에 보낸 유족들이다. 어뢰 공격과 무차별 포격으로 서해 NLL과 서북도서를 지키던 우리 장병과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도발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발 당사자인 북한은 사과는 고사하고, 억지 주장과 발뺌으로 유족의 상처를 헤집는 작태를 해마다 반복하고 있다. 올해도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4월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 취재차 방북한 기자들에게 대놓고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입니다”라고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노동신문은 천안함 폭침이 ‘남측 조작극’이란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신문은 희생 장병들을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을 ‘대결 광대극’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가로막는 ‘적폐 중의 적폐’라고 필자는 본다. 남북이 오랜 불신과 대결을 털어내고 화해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려면 과거 NLL 도발에 대한 북한의 진솔한 사과와 진상 규명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남북 군 당국이 논의할 핵심 의제 중 하나가 ‘서해 NLL의 평화수역화’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한반도의 화약고’인 NLL의 불행한 역사를 ‘패싱(passing)’하지 않고 청산하는 작업이야말로 군사적 신뢰 구축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 해빙무드를 계기로 군이 그 작업에 적극 나서고 북한도 호응할 것으로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달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측은 NLL 도발의 책임과 진상 규명에 대해 어떤 구체적 논의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불미스러운 과거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에 대해 논의했다”는 모호한 문구가 전부였다. 일각에선 10년 만에 열린 군사회담에서 도발 문제를 곧바로 거론하기는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군이 최근 화해 무드를 의식해 북한을 자극할까 봐 할 말을 못한 것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일부 희생 장병 유족은 “북한의 도발을 지우개로 싹 지우듯이 하고, 북한의 비위만 맞추는 대화는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문자를 기자에게 보내기도 했다.
향후 남북 간 비무장지대(DMZ)의 감시초소(GP)와 중화기 철수를 비롯해 군비 통제와 재래식 군축 등 평화협정에 필요한 군사적 조치의 핵심은 첫째도, 둘째도 북한의 진정성이다.
북한이 도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후속 조치를 실천한다면 비핵화 등 대남 유화 기조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불행한 과거는 그냥 덮는 게 능사인 것처럼 어물쩍 넘어가면서 NLL과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비무장화를 진행하는 것은 또 다른 ‘적폐’를 초래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을 군이 명심하길 바란다. 목숨 바쳐 영토와 영해를 지켜낸 장병들의 희생과 유족의 아픔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한반도 화해 평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견인하는 데 군이 온당한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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