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안보 포퓰리즘이 국민과의 약속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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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정부 때 훼손된 안보 기반 복구 소명 부여받은 朴대통령
국민 휴먼 성향에 영합하느라 사드체계, KFX, TPP 등 주요 안보정책 우왕좌왕
이제라도 중국 경사에서 벗어나 한미동맹-자주국방 강화 힘써야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기원전 중국의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살던 미생은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장대비로 강물이 넘치는데도 연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느라 익사하고 말았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古事)다.

이명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을 ‘고지식한 미생’이라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미생지신이라기보다 ‘국민지신(國民之信)’으로 봐야죠”라고 맞받아쳤다.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임을 다시금 각인시킨 계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지신’의 국민 개개인은 어떤 모습의 인간일까? 미국 시카고대의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교수는 ‘넛지’라는 저서에서 인간을 ‘이콘(econ)’과 ‘휴먼(human)’이라는 두 자아(自我)가 서로 갈등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이콘은 멀리 내다보고 합리적으로 계획할 줄 아는 자아다. 반면 휴먼은 행동하는 자아로 근시안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이다. 내일 아침 회사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자기 전에 미리 알람(자명종)을 맞춰놓는 자아가 이콘이라면, 아침에 알람을 끄고 다시 단잠에 빠져드는 자아가 휴먼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의 휴먼 충동을 억제하고 이콘 성향을 극대화시키는 지도자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 안보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그런 지도자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떨까? 아직 임기가 절반 가까이 남아 있는지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안보 정책만 놓고 보면 국민의 휴먼에 영합하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후보 시절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공약했다. 원래 전작권 전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작했다. 그는 한미동맹이 우리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 채 ‘국민적 자존심’을 이유로 한미연합사령부가 갖고 있던 전작권을 2012년 4월에 환수하기로 했다. 한미 관계는 냉랭해졌다.

한미 관계 복원에 힘썼던 이명박 대통령은 전작권 전환을 2015년 12월로 연기하는 데 성공한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야당이 다시 전작권 전환을 국민적 자존심 문제로 들고나오자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차원에서 2015년 전환을 공약했던 것 같다.

그 공약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작년 10월 미국과 전작권 전환 재연기에 합의했다. 박 대통령은 공약 파기에 대해 사과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국민의 휴먼 성향이 잠잠하면 이렇듯 대충 넘어가는 게 ‘신뢰와 원칙의 국민지신’인가.

노무현 정부 때와는 달리 이제 국민 대다수는 전작권 전환 재연기의 불가피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재연기를 보완할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콘 성향의 국민은 안보를 염려한다.

국가안보의 양대 기반은 국방과 외교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미국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외교적 쾌거였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노력이 더해지면서 우리의 안보는 반석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 때부터 자주국방 의지가 차츰 약해지면서 안보 기반에 균열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정부는 북핵(北核)과 전작권 문제로 미국과 큰 갈등을 빚었다. 그간 크게 훼손된 안보 기반을 다시 복구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박 대통령은 안보 재구축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현 정부의 연평균 국방예산 증가율은 4%대로 노무현 정부 때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의 휴먼 성향에 영합하느라 안보 관련 정책들이 우왕좌왕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이다. 주요 안보 현안인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 한국형전투기(KFX)사업,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모두에서 그렇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얼라들’의 인기 영합적 중국 경사(傾斜) 때문에 한미동맹이 약화될까 봐 우려했다. 청와대는 이를 의식한 듯 지난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었다고 연일 자랑한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드는 별 진전이 없고, KFX는 능동위상배열(AESA) 레이더라는 암초에 걸렸으며, TPP는 시기를 놓쳐 추가로 큰 비용을 치르게 생겼다.

박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중국 경사에서 벗어나 장기적 안목에서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동시에 자주국방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휴먼 충동을 억제하고 이콘 성향을 발현시키는 ‘국민지신’이 절실하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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