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송우혜]장례문화, 바꿀 때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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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위추위(余秋雨)라는 중국 평론가의 기행문을 읽다가 “얼어 죽은 사람의 얼굴 표정은 오히려 환하게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라는 대목에서 기이한 충격을 느낀 일이 있다. 사람의 죽음 중에서 ‘얼어 죽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비상한 것인데, 그렇게 죽은 이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라는 것 또한 너무 비상해서 불가사의했다. 사람이 극도의 추위로 의식이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면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은 법열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면서 죽는 것일까?

故人 얼굴 못 보는 애도

우리 한국 문화와 관습으로는 죽은 이의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사망하면 친족 이외의 사람은 아예 시신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이내 염을 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선시대 옷 같은 삼베 수의로 칭칭 싸서 입관해 놓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친족이라도 염을 한 뒤에 온 사람은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조문객들은 단단히 봉인된 관 또는 관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면서 애도한다.

아니다. 고인의 관을 향해 애도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병원 장례식이 일반화된 뒤로는 고인을 입관한 관은 병원 영안실의 냉동 서랍 안에 들어 있고, 조문객은 빈소에서 관이 있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단에 모셔놓은 고인의 사진을 향해서 애도를 표하는 형태로 통일된 상태이다. 바로 그 점에서 보자면 우리 장례 문화는 이미 상당한 질적 변화를 겪은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장례식 풍습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영화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서양식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입관한 뒤에 관 뚜껑을 닫지 않고 돌아가신 분의 신체와 얼굴을 생시와 똑같은 형태로 온전하게 드러내놓고 조문을 받는다. 조문객들은 한 줄로 열을 지어 한 사람씩 관에 다가가서 돌아가신 이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조의를 표한다. 서양의 장례문화가 그렇기 때문에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유달리 좋아했던 품성을 꼬집는 유머도 생겼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결혼식에 가면 신랑이 되고 싶어 했고, 장례식에 가면 시신이 되고 싶어 했다.”

고인의 사진을 향해서 애도하는 것과 고인 본인을 향해서 애도하는 것, 둘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애도가 될까.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는 우리와 서양식 장례문화의 본질적인 차이로 쳐서 충분히 이해하고 용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式 壽衣 문화는 개선해야

현재의 우리 장례문화 중에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것이 바로 ‘수의(壽衣)’이다. 조문의 형태는 고인의 관이 아니라 고인의 사진을 향해 애도를 표하는 방식으로 대폭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인에게 입히는 수의만은 아직도 옛날 조선시대식 그대로이다. 수의의 재료는 삼베이고, 형태는 매우 크게 만든 조선시대식 옷을 겹겹이 껴입히는 거창한 차림새다.

조선시대에는 수의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입는 옷과 같은 모습이었고 같은 재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도 조선시대의 오래된 무덤이 발굴될 때 복식 전문가들이 막중한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

수의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인가. 옛날에는 고인이 수의를 입고 저승으로 가서 그 옷을 입고 살아간다고 생각해서 비싸고 좋은 수의를 마련해서 입혀 드리느라고 애썼다. 요즘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싸고 좋은 수의를 마련하는 전통은 그대로 남았다. 그래서 최상급 안동포처럼 좋은 베로 만든 수의는 부르는 게 값이다. 수의 한 벌에 1000만 원짜리도 있고, 몇백만 원짜리는 흔하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지 간에 별 의미가 없는 명실상부한 과소비로 이젠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된다.

고인이 저승에서 그 수의를 입고 지낼 것이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과도하게 비싼 조선시대 양식의 삼베 수의를 마련해서 시신에게 입히는 일은 무의미하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면 더욱이나 거창한 조선시대식 수의는 무의미하다. 고인이 생시에는 전혀 입었던 적이 없고 치수도 매우 큰 삼베옷을 저승에서 입고 지내라고 강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다. 고 문익환 목사의 집안에서는 상사가 날 때마다 고인이 입던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세탁소에 보내 깨끗이 세탁해서 수의로 썼다. 그래서 생시에 입던 옷과 죽어서 입는 옷이 일치했다. 그것이 대대로 지켜지고 있는 그 집안의 가풍이다. 수의 문제를 고찰할 때 검토할 가치가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swoohy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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