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기택]설날 추억은 영혼의 ‘보약’

  • 입력 2009년 1월 24일 02시 56분


설빔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갖고 있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린다. 아버지 어머니는 그들에게 과자와 사탕을 주며 덕담을 나눈다. 아이들은 세배의 뜻은 잘 모르지만 늘 먹던 보리밥과 된장국 대신 떡국을 먹고 과자와 사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새해 첫날이 신나고 즐겁다. 어떤 아이는 공책을 찢어 윷판을 만들고 나무를 쪼개 윷을 만들어 윷놀이를 즐긴다. 재주 좋은 아이는 대나무를 쪼개고 종이로 몸통과 꼬리를 만들어 붙여 연날리기를 한다.

내가 예전에 보았던 보육원의 새해 풍경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보육원 원장 부부이다. 그때의 설날은 구정이 아니라 신정이다.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예전에는 보육원 아이에게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없었다. 설음식도 설빔도 덕담도 다양한 우리 놀이도 없고 설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기다리는 설렘도 없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차례를 지낼 조상도 없고 부모도 없고 함께 모여 덕담을 나누며 노는 친척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해는 오직 한 번 양력에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정말로 없는 것이 하나가 더 있다. 어른이 되어도 잊히지 않는, 언제나 마음으로 떠올리기만 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명절의 기억이다.

백석의 시에는 유년의 기억이 보물창고처럼 화려하고 풍성하게 저장되어 있다. ‘여우난골족’에는 평북 정주가 고향인 그의 어린 시절 명절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명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방안에 가득 모인 식구의 새옷의 냄새이며,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찰떡의 냄새와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냄새이며, 쥐잡이 숨바꼭질 꼬리잡이,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이와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이이며, 재미있게 생긴 다양한 친척의 모습이다. 백석은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서 고향을 떠나 살았지만 이러한 생생한 기억이 있었기에 시인으로서의 삶은 풍요로웠다. 그의 시는 낙원과도 같은 유년을 지금 여기서 떠올려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명절은 힘든 삶에서 잠깐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이요, 여유다. 나 혼자 이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면 힘들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자식 걱정을 하는 조상과 부모, 형제, 친지, 이웃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 삶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여기에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 더해지면 명절은 마음의 보약을 먹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설날은 백화점 광고 또는 선물 세트에서나 실감할 수 있을 만큼 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하고 힘든 삶을 짊어진 어깨를 다독여 준다.

요즘 보육원에는 부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손 가정의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등 이런저런 이유로 맡겨져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가 많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명절은 더욱 쓸쓸할 것이다. 한 그릇의 떡국과 이웃의 작은 정성은 조금이라도 그 아이들의 언 마음을 녹일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보약처럼 먹을 수 있는 행복한 명절의 기억은 누가 줄 것인가. 이 아이들에게도 어른이 되면 추억을 떠올리며 훈훈해질 수 있는 설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떡국이나 설빔뿐만 아니라 차례도 지내고 세배도 하고 옛날 놀이도 즐겨 보는 풍요로운 명절이 있으면 좋겠다.

금년 설날은 경제 한파에다 날씨 한파까지 겹쳐진다 하니 더 썰렁해보일지 모르겠다. 명절이 되면 불우한 이웃에게 쏟아지던 온정의 손길도 줄어들 것 같다. 모처럼 가족 친지가 모이는 우리 고유의 명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삶의 에너지를 얻자. 그리고 그런 힘을 얻기 힘든 이웃에게 눈길과 손길이 가는 설이 되기를 희망한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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