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봄날’ 가버린 日노인들의 설움

  • 입력 2008년 5월 8일 03시 00분


일본에서 카리스마가 있는 연출가로 알려진 니나가와 유키오(권川幸雄·73) 씨가 이끄는 극단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극단은 ‘사이타마 골드 시어터’다.

2년 전 55세 이상 무경험자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할 때 전국에서 12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현재 단원 43명 중 최고령은 82세, 평균연령은 67세. 연간 두어 차례씩 공연을 하고 있다.

평생 배우와 연출자로 일해 온 니나가와 씨는 “언젠가는 연장자의 연극을 해 보자고 벼르던 사이 나 자신도 고령자가 돼 버렸다”며 시니어 극단의 장점으로 각자 살아온 체험이 녹아들어가 연기에서 남다른 맛이 우러난다는 점을 든다.

극단을 이끌면서 그는 여러 체험을 했다. 걷지 못하던 배우가 연습 중에 지팡이를 놓고 걷게 된 일이 있었다. 어제 외우던 대사를 오늘 잊어버리는 배우에게 “배역에서 빼겠다”고 ‘협박’하자 금세 외우는 모습을 보며 “목표가 있으면 기억력도 부활한다”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령 배우들이 보여주는 “언제까지라도 생기발랄하게 빛나는 존재이고 싶다”는 자세에 감동하게 된다고 한다. 늘그막에 개성을 발휘할 자리를 찾게 된 배우들의 얼굴은 늘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환하게 빛난다.

이와는 반대로 최근 일본 노인들의 표정을 어둡게 하는 일도 있었다. 사회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난달 초 ‘후기(後期) 고령자 의료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제도에 따라 75세 이상 고령자 1300여만 명 전원이 기존 국민건강보험에서 분리돼 새 보험제도로 자동 전환됐다.

이는 2년 전 고이즈미(小泉) 정권에서 처리된 ‘의료제도 개혁 관련법안’에 따른 것이지만, 주무관청인 사회보험청은 제대로 홍보도 않은 채 지난달 15일 고령자 대부분의 유일한 수입원인 연금에서 두 달치 보험료를 공제해버렸다. 노인들은 “75세 넘으면 빨리 죽으란 말이냐”며 탄식하고 있다.

특히 새 의료제도에서는 종말기 환자에게 ‘(당신은) 앞으로 ○주일 생존이 예상된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보여준 뒤 인공호흡기 사용, 링거, 긴급 수술 등의 항목에 희망 여부를 ‘O×’로 답하게 하는 조사를 권장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일본 열도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조사 자체가 환자에게는 “어차피 돌아가실 것, 미래 세대에 부담이나 덜 남기고 가시라”는 무언의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고령자 의료비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의 부담을 줄이고 보험 재정을 안정시키려면 제도 변경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11월 총무성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75세 이상 고령자는 총인구의 10%, 65세 이상 역시 21.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유 있는’ 고육책이라고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관료행정의 무성의하고 배려 없는 처사에 일본 사회 전체가 분개하는 분위기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은 “전후 일본의 고도 성장기를 이끌어온 어르신들에 대한 대접이 아니다”며 이달 안으로 이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참의원에 제출할 방침이다.

평생직장 문화와 든든한 복지제도로 한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회주의’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일본이 ‘고령화 심화’라는 현실 앞에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잃어버리고 있다. 한국 역시 급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노후를 맞이한 한국민들의 표정이 시니어 극단 배우들처럼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지금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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