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戰士강금실의 죽음

  • 입력 2006년 6월 9일 03시 04분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아프지가 않았다. 뭐랄까 ‘서늘한 연민’ 같은 게 가슴을 타고 내렸다.

“전사(戰士)는 자기 삶을 이미 죽음 속에 던지고 생명이 허락된 자정까지 가서 삶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싸웁니다.”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점지된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후보 수락 연설은 그 어떤 정치 연설문에서도 볼 수 없는 단어로 뒤덮여 있었다. 목숨, 진정성, 생명, 삶, 순결함, 그리고 전사. 박선숙 선거대책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봤다.

“공직 후보가 전사라니? 전사라는 말이 얼마나 실존적인 명령인지 알고 쓴 겁니까?” 철학적으로 정확한 어법은 아니었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개인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기산화(自己散華)의 길이라는 뜻으로 물은 말이었다.

박 본부장은 웃으며 “알고 쓴 말”이라고 했다. 박 본부장의 대답과 내 물음이 같은 문법 위에서 오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박 본부장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조막만 한 주먹으로 막 터지려는 둑의 구멍을 막고 있는 네덜란드 소년….”

전사라는 말을 만난 건 로버트 월러의 글에서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쓴 그 월러다. 10년 뒤 ‘A Thousand Country Roads’―한국어로는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으로 번역됐다―라는 제목으로 속편을 내면서 월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러브스토리를 쓰려고 한 게 아니었다. 작가(writer)이자 전사(warrior)인 어떤 사내의 얘기를 쓰고 싶었다.”

그 수많은 길 위에서 풍화(風化)한 ‘작가이자 전사’ 로버트 킨케이드가 전 세계 35개국 독자들에게 남긴 얘기는 이렇다.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런 확실한 느낌은 오직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오. 당신이 아무리 여러 생을 살더라도 말이오(In a universe of ambiguity, this kind of certainty comes only once, no matter how many lifetimes you live).”

구글에서 월러라는 이름을 치면 쉽게 볼 수 있는 인용문이다. 흔히 절대적 사랑을 비유한 말로 회자(膾炙)되지만, 나는 이런 확신이 전사를 일으켜 세우는 실존의 명령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이 사랑을 향한 것이건, 세상을 향한 것이건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전사 강금실’이 월러를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던진 전사의 절규는 미국 텍사스 서부의 외딴곳에서 지금도 전사들을 뒤쫓고 있는 월러를 연상하게 한다.

네덜란드의 소년 강금실은 죽었다. 둑을 막아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의 죽음은 전사의 최후로 추앙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부활시키려 한다. 그도 알 듯 말 듯한 노래로 부활의 예감을 부추긴다.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전사로는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실함은 두 번 오지 않는 것이기에…. 그때는 그냥 ‘○○○ 부대의 솔저(군인)’로 호사가들의 입술 위를 오르내릴 것이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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