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공종식]미국서 발견한 ‘느림의 미학’

  • 입력 2005년 12월 2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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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경험한 ‘문화 충격’은 미국에서는 모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느리다는 점이다.

운전면허증을 딸 때였다. 접수하는 데에만 3시간 넘게 걸렸다. 구비 서류를 확인한 뒤 필기시험 접수증을 발급해 주는 단순한 일이었는데도 1인당 처리 시간이 10분 넘게 걸렸다. 서류를 보다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상급자를 불러 유권해석을 받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러다 보니 앞의 줄이 줄어들지를 않았다. 한국에서라면 한 명에 1분이면 끝날 일이었다.

면허시험장은 그래도 나은 편. 8월 사회보장번호(SSN)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실에 들렀을 때였다. 민원인은 불과 30명 안팎이었고 창구는 3개가 열려 있었다. 길어야 30분이면 일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일 처리 속도가 너무나 느려 내 차례가 오는 데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당초 계획했던 하루 일정은 엉망이 됐다.

전화나 인터넷 설치, 물건 배달도 마찬가지. 약속 시간을 ‘오전 8시∼낮 12시’처럼 넓게 잡아 놓아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러니 처음 몇 달간은 아예 집에서 사람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날이 자주 있었다.

집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월세 금액 등 대부분의 조건이 집주인과 맞아 계약이 하루 이틀 안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몇 가지 사소한 사항을 놓고 집주인과 세입자 측을 대표하는 부동산 중개사들이 ‘협상’을 벌이면서 최종 계약서 확정까지는 일주일도 넘게 걸렸다.

한국에서라면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에 양측 계약 당사자가 모여 앉아 1시간이면 해결할 일이었다.

이런 일을 두 달 정도 겪게 되자 미국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기초적인 업무 처리의 속도가 이렇게 느린데 왜 미국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높은 것일까’라고 자문하기도 했다.

동시에 당연시했던 한국의 ‘신속한 서비스’에 대한 존경심이 새삼 일었다. 이사 당일 전화 한 통만 하면 정확히 시간을 맞춰 전화를 가설해 주고 가스를 설치해 주는 것은 여기서는 상상조차 힘든 ‘초고속 특별 서비스’였다. 서류를 떼는 데 10분도 채 안 걸리는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민원 서비스도 미국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 생활을 오래 한 지인을 만나 이런 문제를 이야기했더니 그는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며 “느리게 사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충고했다. 사실 어찌 보면 기자가 미국 생활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한국의 ‘빠름’과 ‘신속’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외국기자들을 만났을 때 이들이 오히려 “미국인들은 너무 정신없이 빠르게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실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처럼 ‘빠름’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최근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교수 파문이 빚어지면서 일부 외신은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보도했다.

개인적으로는 ‘빠름’을 추구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변변한 부존자원도 없는 나라가 짧은 기간에 세계 11위 규모의 경제 대국이 된 것도 개인과 사회가 치열하게 ‘빠름’을 추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속도’는 여전히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듯 자칫 ‘빠름’만을 강조하다 보면 절차나 원칙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이번 황 교수 파동도 속도에 치중한 나머지 큰 원칙을 무시한 것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사회가 ‘원칙과 질서가 있는 빠름’을 추구하면 좋겠다.

공종식 뉴욕 특파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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