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대도시의 人道主義

  • 입력 2005년 9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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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장래는 희망적이지만 서울의 장래는 절망적이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이것은 1970년대를 살던 수도 시민들이 흔히 내뱉던 푸념이었다. 경제는 연평균 10%를 훨씬 넘는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시절이었다. 급격한 산업화는 급격한 도시화를 몰고 왔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1950년대 말 인구가 겨우(?) 200만 명대에 진입한 서울은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급팽창했다.

그 무렵 유럽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귀국해 보니 서울은 도무지 사람이 어디를 걸어서는 갈 수가 없는 도시로 변해 있었다. 195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나는 전차 차비가 없으면 용산구 후암동에서 남산 길을 돌아 종로구 동숭동의 대학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명동의 찻집에 갈 때도 물론 걸어 나왔다. 당연히 그랬고 또 그럴 수가 있었다. 비단 서울만이 아니다. 이미 100년 전, 200년 전에 산업화·도시화를 이룬 유럽의 도시들은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파리의 번화한 중심가 샹젤리제의 5리(里) 길을 사람들은 주로 걸어 다닌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뒤의 25리, 10km의 가도를 베를린 사람들은 곧잘 산책한다. 그냥 걸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거지 악사’들의 연주를 듣기도 하고 아스팔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미대에 재학 중인 ‘거지 화가’들의 그림을 구경하기도 한다.

유럽과 한국의 판이한 도시 모습의 변화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나는 나름대로 그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도시’에 관해서 이런 말을 되뇌곤 했다. 좋은 도시란 사람이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하고, 거닐 수도 있어야 하며, 또 노닐 수도 있어야 한다고.

너무나 당연한 이러한 생각을 갖는 사람에 대해 “서울에∼서 살∼렵니다”라고 합창하던 대한민국 수도는 6차로, 8차로로 차도를 확장해 가면서도, 1000만 도시 서울의 보도는 인구 30만의 황성옛터 길 폭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여름날 저녁 강바람을 쐬러 갔던 한강변은 고속차도를 닦기 위해 사람들을 멀리 내쫓아 버렸다. 전망 좋은 북악스카이웨이는 애초부터 인도는 없애고 차도만 닦아 놓았다. 문자 그대로 차도 위주의 비인도적(非人道的) 도시 건설이요, 반(反)인도주의적 도시행정이었다.

시장이 한 사람 새로 나오면서 서울의 모습이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다. 수도의 상징 숭례문과 시청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걸을 수 있고, 거닐 수 있고, 노닐 수 있게 됐다. 게다가 경제성장의 그늘로 복개됐던 청계천을 마침내 복원함으로써 이젠 수도 한복판에 장장 수십 리를 걸을 수 있고, 거닐 수 있고, 노닐 수 있는 아름다운 천변(川邊)의 ‘프롬나드(산책로)’가 생겨났다.

나치가 등장하자 남미로 망명해 자살한 오스트리아의 인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절필 ‘어제의 세계’에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도시들은 해마다 아름다워져 갔다고 적고 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한국의 도시들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마다 아름다워져 갔다고 적게 됐으면 싶다. 똑똑한 한 사람의 시장이 나오면 된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오늘날처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든 것도 19세기 한 사람의 시장 G E 오스만이다.

청계천 복원공사의 개가는 그 힘 있는 서울시장 자리에 있었던 전임자들에겐 좀 심기가 불편한 경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현직에 있는 사람, 그것도 서울시장보다 훨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고, 또 할 수 있는지가 온 국민에겐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 못지않게 역경 속에서 권좌에 오른 사생아 출신의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재임 시절 이 권력으로 할 수 있는 무슨 좋은 일이 없는가를 늘 자문했다고 한다.

야당 출신 시장보다 훨씬 막강한 대권을 잡은 노 대통령도 그 권력으로 뭔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없을까를 고민하실 줄 믿는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위해선 강남을 무거운 세금으로 못살게 하는 것보다 강북의 죽은 청계천을 살리는 방책도 있다는 것이 좋은 시사가 됐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대통령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서울보다 대한민국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론 “서울의 장래는 희망적이지만 대한민국의 장래는 절망적”이라는 국민의 푸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최정호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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