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의원님들, 옛 추석 그리워 마시라

  • 입력 2005년 9월 16일 03시 01분


먼저 국회의원들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아무런 선물도 안 들어왔다. 우리도 아무것도 안 보냈다. 시민단체의 감시가 심해져 아예 안 주고 안 받는다.”(A 의원)

“들어오는 선물은 대부분 시도 의원들이나 동료 의원들이 보내온 것들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일부 아는 사람에게만 2만 원짜리 한과를 돌렸다. 물론 지역구 사람들한테는 할 수 없다.”(B 의원)

“지금까지 10여 개 선물이 들어왔다. 선물 대장을 일일이 체크해 동료 의원들이 보낸 건 받지만 받을 이유가 없는 선물은 모두 돌려보낸다. 나도 외부인에겐 선물을 하나도 안 보냈다.”(C 의원)

혹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 추석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이 전하는 선물 풍속도다.

16대 국회 이전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땐 추석이 의원들에게 그야말로 ‘명절’이었다. 들어오는 것도 많았고, 나눠줄 것도 많았다. 중진 의원들한테 추석 선물에 대해 물어 보면 대뜸 “옛날엔 참 좋았지”라는 말부터 꺼낼 정도다.

1980년대에 의원들이 지역구 조직원 등에게 돌리는 선물로 주로 애용한 것은 처음엔 밀가루와 쌀, 다음엔 설탕, 나중엔 참기름이었다. 적게 잡아도 2000∼3000개는 기본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초중반까진 앞치마와 쟁반 같은 생활용품이 주로 애용됐고 후반에는 다양한 상품권이 나오다 현금으로 바뀌었다. 통상 지역구당 7000만∼8000만 원은 들었다고 한다. 인사치레와 선심 치고 이만큼 좋은 게 있을까.

경비 조달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평소 챙겨 놓은 돈도 있는 데다, 기업이나 단체 등 여기저기서 ‘떡값’ 명목으로 찬조 받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손을 벌리기도 했다. 들어오는 선물도 상당했다. 기업 등에서 국회 의원회관으로 사과나 배 상자를 트럭째 싣고 와 의원실마다 돌아다니며 배달하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17대 총선 직전에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이 엄격해지면서 이젠 이런 모습은 사실상 ‘그림의 떡’이 돼 버렸다. 물론 지금이라도 맘먹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대다수의 의원들은 알아서 몸을 사린다.

선물이나 ‘떡값’을 받는 것은 차치하고 작은 선물을 돌리는 것도 대상자를 요모조모 따져 봐야 한다. 지역구 조직원이나 주민은 물론이고 양로원, 경로당, 노인회관 같은 시설에 구호나 자선행위로 금품과 선물을 주는 것도 할 수 없게 돼 있다.

위반자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최고 5000만 원의 포상금을 주고 선물을 받은 사람도 걸리면 50배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니 아예 주거나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게 요즘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의원 중엔 추석 때 재래시장을 돌거나 주민들이 많이 찾는 둔치 같은 곳을 다니면서 인사로 선물을 대신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가 경제뿐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예전보다 한결 맑아진 것도 정치권의 이런 변화 덕분이 아닐까. 다소 불편하고 인간미가 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런 점에서 정치인들은 ‘화려했던 옛날’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바뀌고 있고, 그 중심에 바로 자신들이 있으니….

이진녕 정치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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